아이들은 쑥쑥 큰다. 어느덧 두녀석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다. 4학년, 5학년이니 해를 넘기면 이제 초등 학교생활의 끝자락에 들어서겠다. 이러다가 이 녀석들 곧 중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으로 짠하고 나타나 또다시 내 마음을몽글몽글해지게 만들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두 아이들에게도 남은 초등 학교생활이 즐거운 추억으로 남길 바랬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코로나'가올 한 해를 통으로 날려버렸다.등교 수업은 일주일에 단 한번, 그것도 짝수, 홀수로 나뉘어 등교하는 통에 우리 아이들은 같은 반 아이들과 완전체가 되어서 수업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다.
학교에 안 가는 날엔 두 아이 모두 온라인 수업을 한다. 쌍방향 수업은 아니고 선생님이 과목별 콘텐츠를 올려놓고 아이들이 영상을 보면서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영상을 보면서 혼자서 하는 공부라 과연 학습효과가 있을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뉴스에서는 온라인 수업으로 인해 아이들 간 학력격차가 벌어진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내가 가르치는 중고등학생들 말에 의하면, 영상을 돌려놓고 게임을 하거나 잠을 자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라 했다. 이미 온라인 수업으로 삼각비 단원이 끝난 상황에서 등교 수업 때 점검 차원으로 삼각비 단원에 대한 시험을 보았다는데, sin30의 값조차 모르는 아이들이 열명이 넘는다 했다. 다들 깜지를 쓰느라 학교에서 나머지 공부를 했단다. 중고등학생도 그러할진대 초등학생들은 오죽할까.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나도 슬슬 우리 아이들의 학습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수학이야 평소에 조금씩 나와 공부를 해왔던 터라 크게 걱정되진 않았지만, 사회와 과학이 문제였다.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사들고 와서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온라인 진도에 맞춰서 그때그때 풀어보자. 엄마가 채점해줄게. 일단 오늘은 사회 1단원~사회는 앞쪽에 개념 정리된 거 읽고, 중요한 부분 밑줄 그어가면서 외우고, 문제 풀 땐 앞에 내용 정리된 거 보지 말고 풀어야 해. " 고급지게 조분조분 설명해주었다.
두 아이 모두 공부 모드에 돌입하셨다. 연년생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 학습할 때는 이점이 많다. 첫째가 쓰던 책을 둘째가 물려받을 수도 있고, 학습에 집중해야 할 시기가 비슷해서 집이 독서실화되는 과정에서 분란이 없다. 첫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둘째에게는 훨씬 수월한 학습방법을 제시해줄 수도 있다.
4학년인 민서의 사회 1단원은 '촌락과 도시의 생활 모습'이다. 작년에 민혁이가 4학년이었을 때 공부하는 걸 봤던 부분이라 그다지 어려운 단원이 아니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민서의 학습은 민서에게 맡겨두고, 나에게도 생소한 민혁이의 사회 단원을 둘러보았다. 1단원 '옛사람들의 삶과 문화'. 제목부터가 남다르다. 5학년 사회는 '역사'파트다. 역사라면 내가 머리를 쥐어뜯는 과목이다. 학창 시절 역사 선생님은 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라고,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목이라고 누누히 강조하셨는데, 난 당최 그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전체적인 흐름이 도통 나에게는 잡히지가 않았고, 암기하는 과목이 아니라면서 그놈의 연도별로 나열하는 문제 따위는 도대체 왜 내는 거란 말인가.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며, 쓰잘 때기 없는 역사과목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곤 했다.(전국의 역사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역사시험 전날이면 대야에 얼음물을 받아 발을 담그고 날밤을 샜다. '달달달달' 연도를 외우고, 유물 이름을 외워 시험을 보곤 했다. 어찌어찌 성적은 잘 나왔다. 근데 문제는 시험이 끝나고 종이 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있던 역사 지식은 통으로 날아가곤 했다. 벼락치기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인가. 지금의 내 역사 지식은 거의 백지와 다름이 없다.
피는 통한다고 했다. 민혁이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문제를 풀면서 계속 개념 정리 부분을 들여다본다. 안 되겠어서 내용을 같이 정리해보며 외워보기로 했다.
난 역사 바보다. 전체적인 흐름을 짚어내 주기엔 기초지식이 너무 없음을 먼저 밝힌다.
"민혁아. 고조선의 토기는 미송리식 토기야. 따라 해 봐. 미송리식! 미친 송사리!! 미송리!"
"고구려는 주몽이 세웠지. 근데 주몽은 쫄보여서 해외여행은 못 가고 국내선만 타고 다녔대. 주몽은 고구려를 '졸본'에 세웠다가, 나중에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정복활동을 했어."
민혁이는 자지러졌다. 웃기지만 나로서는 다른 수가 없다. 엉터리지만 이렇게 같이 외우니 문제집을 풀 때는 전보다 훨씬 속도도 나고 외우는 것도 제법 많아졌다. 심지어는 민혁이에게서 엄마가 사회 선생님보다 재밌게 가르친다는 소리도 들었다.
뿌듯한 마음으로 1단원 문제를 다 풀고 민혁이에게 점검차 물었다.
"고조선의 토기가 뭐였지?"
민혁. 거침없이 대답했다.
"미사리식 토기!!!"
이번엔 내가 자지러졌다. '헐'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친 송사리'가 '미송리'가 아니라 '미사리'가 되었구나. 아무래도 사회는 '인강'을 알아봐야겠다.
저녁식사 후,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 난 또다시 열변을 토했다.
"도대체가 말이야. 역사는 왜 배워야 하냐고. 사회생활하면서 역사가 뭔 소용이 있냐고. 왜 그렇게 외울 것만 잔뜩 만들어놓고, 시험을 보게 하냔 말이야. 초등학교 5학년인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와. 뭔지 모르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본이고, 불국사에서 발견되었대. 아니. 그 이름도 복잡한걸 어린애들한테 왜 가르치냐고. 아. 이해 안 돼"
남편이 피식 웃는다.
"그렇게 치면 제일 쓸데없는 과목이 '수학'이야."
"뭔 소리야. 수학이 얼마나 재밌는데. 정신 산란할 때 수학 문제 풀어봐. 마음도 차분해지고 잡생각도 안 들어."
남편은 이제 대놓고 낄낄댄다.
"야. 어디 가서 그 딴말하지 마. 욕먹어. 역사 지식 많은 사람은 기본상식이 많다는 소리라도 듣지."
이쯤 되면 나도 할 말이 없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미적분을 논하고, 로그함수, 삼각함수를 논할 일은 없다. 돈 계산만 잘하면 어디 가서 빠지질 않는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다. 아이들과 문화유적을 둘러볼 때나, 사극을 볼 때, 대하소설을 읽을 때 등 역사적 지식이 필요한 순간은 종종 생긴다. 분하지만 내가 졌다.
산책을 마치고 믿었던 딸아이의 문제집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역시 딸이다. 아들의 사회공부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내 정신에 활기를 불어넣어주신다.
문제 : 도시에 살던 사람이 촌락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쓰시오.
정답 : 귀농 또는 귀촌
민서의 답 : 이사 (두둥~)
남편과 나, 아들이 함께 나뒹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민서가 외친다.
"엄마! 왜? 이사 맞잖아!"
그래. 민서야. 이사도 맞다.저 할머니 이사 가셨네. 근데 엄만 왜 이리 웃기니.
내가 아이들 공부를 봐줄 수 있는 날이 그리 길진 않을 것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과 트러블도 생길 테고, 그것보다 내용이 너무 어려워지면 내 지식으로 커버 안 되는 내용들이 많아질 테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엄마 힘들까 봐 가끔씩 빵빵 터지는 답안을 제출해 주는 아이들이 있어 참 좋고, 지금 이 순간이 참 좋다. 아이들과 함께하면 웃을 일은 어느 곳에서든 느닷없이 찾아온다.
아이들이 각자의 성격에 맞는 학습법을 터득해서 수월하게 학창 시절을 보내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는 늘 이 자리에서 너희들을 응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