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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Dec 12. 2022

  그리움에 대하여

[장편소설] 매화나무 아래서 그들은 울었다.

꼬꼬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자율주행으로 설정하고 눈을 감았다.     


옆에 있는 나나에겐 미안해서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데 비비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나나에게 불만은 없었다. 아니 나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비비와 있는 동안 나나가 걱정됐고 나나가 보고 싶었다.


비비의 무엇엔가 이끌려 이성을 잃고 말았지만 마음 한켠엔 나나 생각뿐이었다. 나나 생각으로 마음이 무겁다 못해 슬프고 괴로웠다.




나나는 좋은 여자였다. 완벽한 여자라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다.


두 번 다시 이런 사람을 만나긴 힘들 거야.


나나는 바르고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왔고 그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나는 꼬꼬를 좋아했다. 나나는 꼬꼬를 꼬꼬보다 아껴주는 사람이었다.


꼬꼬도 나나를 좋아했다. 나나보다 나나를 더 좋아한 꼬꼬였다.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했다.  


언젠가 휴대전화 메모장에 낙서처럼 끄적여 놓은 글이 떠올랐다.


나나가 그립고 사랑스러워 끄적인 낙서였다.


제목은 '오래된 습관'이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침대 옆으로 가서

그녀가 보고 있다가 떨어뜨린

휴대전화기를 충전기에 꽂고

몰래 입 맞추다 잠 깨우기


그녀를 허벅지에 앉히고

컴퓨터로 가보고 싶은 곳

사고 싶은 것 검색하다

열라 싸우기


누구에게나 여자의 가슴은

향수라고 우기면서

만지게 해달라고 조르다

결국 거절당하고

애꿎은 나나의 배만 쪼물딱 거리기


매일은 아니라도

일 년에 쉰두 번은 채워야 한다고

주장해봤자 들은 척 만 척

한 달에 한두 번 그것도

나나가 원하거나 허락할 때만

알몸으로 뒹굴기


꼬꼬의 배 위에 엎드려 자는

나나의 엉덩이를 쓰담하기



이 글을 읽은 나나는 재밌다 웃으면서도 유치하니까 지우라고 했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무섭다고도 했다.


꼬꼬는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저장해 두고 가끔씩 읽어보았다. 출장지 호텔 방에서 나나와 통화를 할 때도 종종 이 글을 눈으로 읽으며 혼자 흐뭇하게 웃었다.


잠자리 횟수에 대한 불만을 알아주기는커녕 무시해버린 것이 좀 아쉬웠지만 나나는 부족한 횟수를 상쇄할 만큼 최고였기 때문에 달리 불만은 없었다.  


지금도 나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어쩌자고 비비에 대한 그리움은 그리움 대로 차올라서 넘칠 지경인지.


이중의 괴로움이 먹장구름처럼 꼬꼬를 뒤덮었다. 꼬꼬의 내면은 밀도 높은 어둠에 휩싸였고 금방이라도 천둥번개가 치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나나에 대한 사랑과 비비에 대한 그리움. 양립이 허용되지 않는 사랑과 그리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꼬꼬가 미쳤군. 미쳐가는 게 아니라 미치고 말았어. 어떻게 미치지 않겠어.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어. 꼬꼬가 가장 싫어하는 이중의 마음. 나나도 배신감으로 가슴이 찢어졌을 게 분명해.


꼬꼬는 되뇌면서 실눈을 뜨고 계기판을 바라보다 참을 수 없는 숨을 조심스럽게 토했다. 무겁고 외롭고 처절한 슬픔이 폭발하고 말 것 같았다.


설정 속도 시속 120km.


주행 속도 시속 100km.


단속 구간 표시와 고속버스전용차로 이용 가능하다는 알림도 떠 있었다. 그러나 굳이 고속버스전용차로로 달리고 싶지도 않았고 단속 구간이어서 의미도 없었다.





처음엔 자율주행 상태일 때도 불안한 마음에 핸들을 꽉 잡고 있어야만 했다. 자동차가 알아서 운행한다는 걸 알기는 한데 완전히 믿고 맡겨지지 않았다.


앞차와 부딪칠 것 같았고 금방이라도 차선을 벗어날 것 같았다.


오른발을 들었다 놨다 언제라도 브레이크를 밟을 만반의 준비를 한 채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이유였다.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안전하게 주행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규정에 맞는 속도를 정확하게 지키는 걸 매번 확인하자 차츰 마음을 놓게 되었다.


이제 속도위반으로 딱지 뗄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렇게 자율주행에 대한 믿음이 생기자 운전이 편해졌다.


비유가 좀 우습긴 하지만 나나는 자율주행 자동차처럼 완벽했다. 최신의 감성과 최고의 성품이 탑재된 완벽한 사람. 뭐를 하든 어디를 가든 믿고 따라도 되는 사람.




- 꼬꼬, 우리 일단 돌아가요. 그게 좋을 거 같아요.

나나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으로 힘들어하는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일단 돌아가서 우리가, 그러니까 서로가 참을 수 없이 보고 싶고 그리우면......


저도 솔직히 지금 우리의 감정이 사랑이 아니길 바라요.


아시잖아요. 비비는 여전히 초초를 사랑해요. 꼬꼬도 여전히 나나를 사랑하고 있고.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그저 욕망이었기를.....


욕망은 소유하고 나면 사라져요. 사라질 것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고요.


꼬꼬의 마음도 그럴 거예요.


벽 미명에 비비가 그렇게 정리해주지 않았다면 꼬꼬는 미치고 말았을지 몰랐다.


비비와 키스를 하고 난 뒤부터 시작된 이중의 괴로움은 그렇게 정리가 되는 듯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비비의 말대로 일단 헤어져 나나에게 돌아왔을 때 마음이 그렇게 평화로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비에 대한 생각으로 고통스러웠다. 비비가 보고 싶었다.


이중의 고통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늘 새벽


나나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꼬꼬가 돌아온 것도 몰랐다.      


자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실눈을 떠보니 꼬꼬였다.


하긴 꼬꼬 말고 누가 오겠는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도 꼬꼬뿐이니 당연했다.     


화보다 반가움이 먼저였다. 며칠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대로 남남으로 갈라설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 응, 왔어.


나나는 평소처럼 꼬꼬를 반겼다. 사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 미안, 잠 깨워서. 화장도 안 지우고 잤네. 내가 지워줄게.


그제야 초초가 아파트 현관까지 데려다주고 간 것과 혼자서 양주를 마시다 방으로 들어와 누워버린 생각이 났다.

      

꼬꼬는 꼬꼬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화장수와 화장솜을 가지고 와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나는 꼬꼬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았다. 화장을 닦아주는 일이 처음도 아닌 데다 삐진 것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나는 눈을 감은 채로 꼬꼬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생각했다. 나나에 대한 미안함도 있겠지만 비비에 대한 그리움도 있으리라 짐작되었다.


화장수를 머금은 화장솜이 얼굴에 스칠 때마다 어쩐지 마음도 닦이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고 햇볕이 드는 기분이었다.


- 나나는, 절대 꼬꼬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나나가 싫어졌다고 해도 보내주지 않을 거고. 당분간 괴롭겠지만 이겨내. 다른 방법은 없어.


나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잠자리까지 간 것 같지 않았지만 갔다고 해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았다.


- 눈 좀 붙여. 자고 일어나서 '바닷가'에 갔다 오자. 거기 다녀온 지 오래됐잖아.


바다가 보고 싶기도 하고.


삼촌한테 전화해서 우리 방에 손님 받지 말라 해 놓을게.


오늘이 토요일이라 방이 없으려나. 아무튼 가자. 안 되면 삼촌집에서 하루 자지 뭐. 적어도 내일은 방이 날 거야. 한 사나흘 거기서 보내자. 내가 좋아하는 노을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 미안하고 고마워.


- 뭐가?


- 전부다.


- 고마워는 해도 되는데, 미안할 건 없어. 나도 잠자리에 대한 불만이 꼬꼬를 그렇게 만들었다고는 생각 안 해. 그 정도였으면 못 간다 말하지 않았겠지.


꼬꼬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썼어. 비비와 꼬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하려고 말이야. 비비도 절대 가벼운 여자가 아니라는 걸 내가 잘 아니까.


비비도 미워하지 않아. 질투가 안 나는 건 아니지만, 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질투할 일도 화낼 일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비비랑 잘 되게 해 줄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았어.


꼬꼬를 잃고 싶지도 않지만.......


사실 나도 마음은 복잡했어.


그런데 그냥 내 남자가 아름다운 것에 잠시 반했다 생각하기로 했어. 그럴 수 있잖아.


누군가에게 감격하기도 하고 누군가가 그립기도 하고.


언젠가 우리 여행 중이었는데 어떤 남자가 우리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한 적이 있었어.


꼬꼬가 사진을 찍어주고 우리보다 조금 어려 보이던 그 남자는 혼자 호수를 무대로 뒤돌아 서 있었지. 사실 나는 며칠 동안 그 남자의 뒷모습을 그리워했었어.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그 남자의 뒷모습.


왜 그런지 모르지만 그 남자가 자꾸 생각나고, 생각나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쓸쓸해지고 그랬어.


내가 저녁노을을 보고 눈물짓는 것처럼 그렇게 쓸쓸하고 눈물 났어.  


하지만 곧 잊혔어. 사람이라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 사람이 사람을 보고 감동할 수 있고 그리워할 수 있다고.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겠지.


아주 멀리 떨어져 사는 짐승들의 사랑도 생각해봤어. 짝을 찾아서 아주 먼 곳을 여행하는 짐승들 말이야.


야생에서도 그렇지만 집에 가둬놓은 짐승들도 때로는 짝을 찾아가기 위해 묶인 줄을 끊고 가출하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이르러 짝을 만나 짝짓기를 하고.


그걸 막기 위해 사람들은 잔인하게 거세를 해버리지만. 슬픈 일이지.


우리도 짐승이니까 우리에게도 짝짓기 습성은 남아 있을 거야.


쓸쓸한 그리움에 대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봤어. 우리도 어쩌지 못하는 쓸쓸한 그리움이 생기기도 하는 것에 대해. 짐승의 그리움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을 죄로 여기거나, 더럽게 여기거나, 불량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난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것은 어쩌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 어쩌지 못하는 그리움도 있는 거라고.


우리도 그리움에서 출발했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사랑이야. 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사랑. 일순간 스쳐가는 감정이 아니라.


꼬꼬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어.


꼬꼬도 비비도 다 잃기 싫지만. 어쩌면 비비는 못 보겠지. 내가 그 정도까지는 안 될지 모르지만 비비는 그리움으로 남겨두기로 했어. 좋았던 사람으로.


꼬꼬가 샤워를 하는 동안 나나는 다시 잠들었다. 나나는 마침내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눈을 뜨니 오전 열 시가 넘었었다. 꼬꼬는 옅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지난밤이 꿈만 같았다.


나나는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외삼촌에게 전화를 넣었다.


외삼촌은 그러잖아도 나나가 올 것 같아서 방에 손님을 안 받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꼬꼬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 우리 방 비워놨데. 준비하고 가자.


나나가 말하는데 꼬꼬가 다가와 안았다. 나나는 꼬꼬의 등을 쓰다듬었다.




- 우는 거야.


나나는 빙글빙글 혼자서 돌아가는 핸들을 놔둔 채 등을 기대고 앉은 꼬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나는 꼬꼬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 많이 힘들구나. 그래 울어. 실컷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나나가 말하는데 꼬꼬가 나나 쪽으로 엎드리더니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나는 울음을 삼키느라 고개를 젖혔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꼬꼬의 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단속 구간을 지난 자동차는 120km로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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