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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빈 Jun 09. 2024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연신내에서 빅 5까지, 정신과 진료기 (3)

 셀 수 없이 반복된 입원으로 지치고 지친 상태였다. 병원에 들어가서도 교통카드, 손, 부서진 물건 등..으로 매일 자해를 했고, 더 이상 나에겐 미래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고 느꼈다. 그러다 병동에서 코로나에 걸렸다. 병동을 비상사태로 만들었다. 입원한 병원의 응급실에서 3일 전 코로나 검사를 했기에 병원도 나를 탓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간호사 선생님께서 방호복을 입고 격리실에 들어와야 했고, 그때 마침 집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이슈가 생겨 대학병원 감염관리실에 입원까지 했다.


 7일간의 격리를 마치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더 이상 폐쇄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첫 개방병동 생활이 시작됐다. 개방병동에 들어와서 여러 친구들을 만났다. 정말 좋은 사람들과 정말 따뜻한 병동. 친구들이 있었지만 제한된 환경에서 제한된 관계만을 가질 수 있는 폐쇄병동과 다르게, 개방병동에서는 배달이나 외부 음식 반입도 가능했고, 따로 참가해야 할 프로그램도 없었기에 병동 안 사람들과 가족같이 지내며 같이 울고, 웃었다. 우울해하는 나를 위해 병동 사람들은 외출 시간에 나를 끌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산책을 가기까지 했다. 주변의 끝없는 응원과 위로에 조금 나아질 법도 했지만, 사실 나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가면을 쓰고 웃어야 하는 시간이 많아져 내 삶은 더욱 망가져가는 것 같았다.


  비상약을 달고 살았다. 조금만 우울하면 마음도 따라 심란하여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다. 가만히 있으면 죽고 싶다는 생각에 잠식당할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주치의 선생님과 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마다 나는 나아질 수 없는 환자이고 내 미래는 결국 병에 의해 죽게 되리라 말하며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아무것도 또 무슨 말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름대로 잘 살아보고자 기를 쓰고 노력했던 내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았다. 밤마다 스틸녹스(졸피뎀)를 먹고 간신히 잠에 들었고, 간호사 선생님이 버티다 잠든 내 취침등을 꺼주러 매일 다녀가셨다.


 수면제 탓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유독 힘들어하던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에 일어났다. 비몽사몽 한 상태로 일어나자, 선생님께서 침상 옆에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뜬금없는 긴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는 잠에서 채 깨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사실 그래서 지금도 죄송하지만 그 정확한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들이 또 가족들이 아무리 이야기해 줘도 그저 동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던 말들이 선생님의 목소리를 타고 겹쳐 들렸다.


 네 소식을 처음 듣고, 모든 게 내 탓인 거 같아 눈물이 났어. 새벽이라도 밤이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소리 켜두고 기다릴게. 딸, 이제껏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언제든지 말해줘 같은 실수 다시는 안 할게.


 나를 배려해 돌리고 돌려 말하던 사랑한다는 말들이, 차마 그 말에 또 살아내고 싶어질까 봐 애써 외면하던 내가 보였다. 나는 항상 노력하고 애써야만 사랑받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 만으로 안도하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내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잘 웃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존재를 아껴주는 거구나. 눈을 뜨면 병원 천장이 보이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던 내가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래도, 인정하기 싫지만 그래도 치료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모두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너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따뜻한 관심 몇 마디. 나는 그저 그 말에 흔들리고 말았다. 세상을 피해 숨고, 도망치고, 떠나갈 마음에서.


 이야기를 듣던 같은 방을 쓰던 또래의 친구들이 "저 선생님은 너네 엄마 같아."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셨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걱정하고 나를 위하지만 잘 모르는 병 앞에서 두려워하는 엄마의 조심스러운 말은 날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내가 엄마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엄마가 나를 위로해 줄 때마다, 훨씬 더 아플 엄마의 가슴에 마음이 무거웠다. 내 아픔보다 '진짜 나'를 더 응원해 주고, 더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다. 아는 사람들 앞에서는 내 아픔이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간호사 선생님과는 달랐다. 비록 선생님이 그저 '치료적 절차'에 따라 나를 '간호'하고 '치료' 하기 위한 관심이었을지 모르지만, '간호사'라는 직업 앞에서 나는 온전히 환자가 되어 온전히 위로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가능했고, 당연했다.


 교사가 되어 아이들의 말과 행동 내면의 때론 즐겁고, 때론 아프며, 때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제일 먼저 알아주고 싶었다. 아이들의 부족한 부분이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채워지길 바랐고,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행동하고 싶었다. 그건 내가 학교에 다니며 의지하지 못했던 모두에 대한 치유이자, 위로였다. 하지만 불안과 공황은 내가 교탁 앞에 서는 것을 자꾸 주저하게 했다. 나는 신경안정제가 없이는 모의 수업조차 벌벌 떨었다. 게다가 전공 국어 또한 나와 맞지 않았다. 국어를 공부할 때면 흥미를 느끼지 못함과 동시에 임용고시를 봐야 하는 내가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것과 잘해야 할 것이 국어인데, 국어를 싫어하는 국어교사라니.


 하지만 국어를 좋아하지 않아도 나와 모두를 치유해 줄 다른 길이 있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마음을 쏟는 것. 내가 아이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어쩌면 나만의 필요일지도 모르는 배움과 위로를 주는 것보다 내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조금이라도 마음의 불씨를 밝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하루에 10알 넘게 먹던 약들보다 더 큰 희망이 나를 이끌었다.


 어떤 병이든 환자들의 마음을 가장 곁에서 느끼고 알아주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보호자나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지 못하고 혼자 곪아가는 환자들의 몸과 마음이 기댈 수 있는 존재인 나를 통해 치유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오랜 기간 아파왔기에, 아픔이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하게 만드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생각한다. 어려운 환자가 있을지어도, 나에게 온갖 감정노동을 요구해도 나는 '환자'와 '간호사'라는 연결된 바운더리 안에서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앞서가는 마음과 따라가지 못하는 몸의 괴리로 힘든 나날을 겪고 있는 지금, 잔잔한 인디밴드의 가삿말처럼 들리던 그날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미처 전하지 못했던 진심들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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