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이라는 숫자의 힘에 대해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대학시절 아주 짧게 편집장을 맡았던 소식지에서 편집장으로는 처음 발행한 3월호의 서문이었다. 그 글에서 나는 매년 3월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 번째 시작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1월 1일, 음력설에 이어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다짐하고 출발하기 좋은 시기이니까) 이제는 찾지도 못하는 그 글을 오랜만에 떠올린 건 지난주에 맞은 입사기념일 때문이다. 당시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숫자 3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서부터 완전한 숫자로 여겨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동양과 서양이 다소 다르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고대 신화나 역사, 올림픽 메달까지 우리는 굉장히 많은 3을 일상 속에서 만난다.
지난주 맞은 나의 입사 3주년은 하필 세 번째(3)이기도 했다. 이미 7년 반, 3년 반을 다녔던 이전 회사에서의 3주년도 스치듯 지난 마당에 이번 3주년은 조금 다른 감상들이 있었다. 세 번째이기 때문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3의 특별함 앞에서 이걸 그냥 스쳐가기는 아쉬워, 이 즈음의 생각을 남겨본다.
더 특별한 기념일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의 생일을 챙겨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 좀 더 가까운 사이라면 결혼기념일도 자주 축하하는 기념일이다. 다른 사람의 기념일을 챙길 때 그 두 가지만 한 날이 있겠냐마는 개인적으로 내겐 생일보다 입사기념일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부터 생일에 큰 기대가 없었다. 축하 자체가 기분 좋거나 주고받는 선물을 기대하기보다는 나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과 오랜만에 서로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음이 생일의 가장 좋은 점이니까. 게다가 인생에서의 1년씩을 돌아보고 추억해 보는 건 생일보다 1월 1일이 기준이 되는 편이 조금 더 편하다. 그래서인지 생일에 지난 1년 간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딱히 어떤 의미를 생각하며 생일을 기다려본 적도 없었다.
반면 입사기념일은 조금 다르다. 손꼽아 기다릴 정도는 아니지만 캘린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얼마나 남았는지 인식하게 된다. 특히 내 경우 다양한 구성원들과 대화하는 직무이기에 처음 인사를 나눌 때 근무 기간을 소개하면서 (최근에는 온보딩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면서 더더욱) 자연히 알게 된다. 대화의 시기에 따라 오늘이 내 직전입사일과 가까운지, 다음 입사일이 가까운지로 기준을 삼아 이야기하게 된다.얼마 전까지 '곧 있으면 3년'이었던 내 근속기간은 이제 '3년 조금 넘은'이 되었다.
올해 입사기념일에는 휴가 중이었다. 일부러 그 시기를 노렸던 것은 아니지만, 항공권 예약을 하면서 입사기념일이 끼어있다는 걸 알았다. 코로나 19 이전에는 특별한 날들을 해외에서 보내도록 여행을 떠난 경험이 많이 있었는데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의도치 않게 입사기념일에도 한번 떠나게 된 셈이다. 그것도 3년 반 만의 해외여행으로. 하지만 여행 중에 특별히 따로 지난 3년을 돌아본 건 아니었다. 쉼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최고의 선물, 피드백
회사에서의 시간을 돌아볼 기회는 지금의 회사에서는 적절한 주기, 적절한 방법으로 이미 제공된다. 마음과 시간을 담아 준비한 피드백을 전달하는 정기 피드백 세션이다. 전사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입사기념일에 맞춰서 제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내 경우 입사일과 비슷한 시기여서 기념일의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따로 입사기념일 선물을 받지만, 피드백이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바로 이게 나의 기념일에 따로 시간을 내어 지난 3년 간의 회사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던 이유다.
나는 줄리 주오가 쓴 <팀장의 탄생>에서 표현한 '피드백은 선물이다'라는 표현을 좋아하고 자주 인용한다. 진심으로 상대를 위하는 피드백을 준다는 건 평가나 채점이 아니라 편지에 가깝고, 선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선물보다 편지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고) 생일 같은 기념일에 선물을 주고받듯이, 우리 회사에서 주고받는 피드백은 정말 좋은 선물이자 마음을 써낸 편지가 된다.
상대에게 도움을 주려는 마음과 관심이 없다면 제대로 피드백을 줄 수 없다. 사실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한다는 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선물 중에서 마음과 시간을 쓴 것만큼 좋은 것이 있을까. (내가 편지를 더 좋아하는 이유다) 생일에 흔히 주고받는 기프티콘보다는 분명 더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피드백 문화가 지금 회사의 다양한 가치와 제도들 가운데 가장 '우리답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 특별한 선물이 내가 지금의 회사에서 만 3년을 지나가게 한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난 3년을 돌아보면 과거의 입사 3주년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그간 내가 한 일이나 만들어낸 변화가 많았다. 반대로 아쉬움은 극히 적었다. 나의 세 번째 입사 3주년이 지난 두 번의 입사 3주년과 달랐던 건 내 역량과 경험의 차이보다는 환경과 문화의 변화가 크다고 생각한다. 동료들로부터 받은 솔직하고 따뜻한, 그래서 내가 공감하고 감응할 수 있는 피드백이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한다. 그 변화는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다. 나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고, 관심을 가지고 진심 어린피드백을 주는 동료들이 많다. 그리고 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쌓인 신뢰는 내가 다른 동료에게도 그렇게 도움이 되는 동료가 될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 회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장'도 결국 이 튼튼한 순환구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해 본다.
사실 회사에 합류하면서 상상해 본 미래의 내 모습에 오늘은 없었다. 이곳에서의 3년 후를 그려보지도 않았고, 지금과 같은 리더 역할을 구체적으로 정하지도 않았다. '다음번에는 리더 역할을 도전해 보자' 정도가 가장 구체적인 생각이었다. 현재처럼 큰 규모의 조직을 꾸린다거나 이렇게나 든든한 동료들과, 다양한 직무와 함께 일하는 일상도 당연히 예상 밖이다. 상상한 것 이상을 할 수 있게 됐고, 그리고 그 이상까지도 그려보게 됐다. 3년 동안 받아온 정말 많은, 크고 작은 선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새로운 여정
여행 중 하루였던 세 번째 3주년. 서프라이즈 생일파티처럼, 잊고 있다가 갑자기 번쩍하는 느낌으로 오늘이 입사기념일이라는 게 떠올랐다. 휴가였으니 HR 시스템에 접속할 일도 없고, 스스로 기억하지 않는다면 입사기념일을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오전에 숙소 근처의 큰 공원을 찾아 산책하고, 오래전 윈도 OS 배경화면 같은 푸른 잔디에 앉아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문득 시간을 보다가 떠올랐다. 오늘이었구나. 전날 밤 내린 비의 습기가 거목들의 나무 향과 함께 느껴지는 도심 속 공원의 공기는 시간도 공간도 한참 먼 그날을 소환해 왔다.
3년 전의 오늘, 3주 정도의 휴식을 끝내고 내 세 번째 회사에 첫 출근하던 날. 여름의 습기가 묻은 아침 공기, 일주일 전 예행연습 삼아 와봤던 것과 같은 버스 노선, 이전 회사의 고층 건물과 달리 낮고 또 작아서 더 긴장된 사무실의 첫인상. 먼저 다가와 인사와 함께 머쓱하게 명함을 건네주었던 처음 만난 팀원, 화상으로 진행된 면접 때문에 화면에서 튀어나온 것 같던 팀장과 동료들. 회사의 전체 구성원 앞에서 건넨 첫인사. 첫 퇴근길에 잠시 걸었던 경의선 숲길의 저녁 공기까지.
짧게 3년 전 오늘을 회상하다가 아직은 답을 알 수 없을 두 가지 질문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몇 번의 입사기념일을 이곳에서 더 보내게 될까. 앞으로의 나에게 3주년 입사기념일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당장 답을 구하거나 상상해 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답은 내게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게 회사에 달려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결국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본다. 구성원 혼자의 힘으로 회사를 180도 바꿀 수는 없지만, 제대로 일하고 있다면 분명 회사의 방향과 속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입사기념일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다면, 나와 좋은 동료들이 계속 함께하고 싶은 회사가 될 수 있게 힘을 보태면 된다.
완전수라는 3을 넘어 나의 세 번째 여정은 또 하나의 새로운 구간에 접어든다. 언젠가 새로운 여정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내가 접어든 새 구간에서 내가 할 수 있고 잘해왔던 일들을 한다. 보이지 않는 새 여정을 고민하다가는 지금 여정을 놓치게 된다. 세 번째 코너를 넘어선 지금도 나에게는 새로운 여정이니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내가 좋아하고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가는 일, 그런 매일의 일.
에필로그 - 그날 아침
세 번째 입사 3주년, 그 아침에는 한국에서라면 '새벽'이라고 할만한 시간에 눈을 떴다. 침대에서 잠시 뒤척거리다가 이런 메모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상보다 더 피곤하고 뻐근한 여행지에서의 날들인데도 알람 없이도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이 신기해서 남겼던 문장이다.
아침을 깨우는 건 알람도, 햇빛도, 지각에 대한 걱정도 아니고 그 하루에 대한 기대여야 한다.
그러고 보면 기대와 설렘으로 매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도, 지난 3년 간 출근이 싫어서 눈을 뜨지 못하거나 월요일을 피하고 싶던 날은 없었다. 어쩌면 이게 최근의 3년, 즉 세 번째 입사 3주년을 지난 두 차례와 다르게 느끼게 한 가장 큰 차이가 아니었을까.
(참고) 지난 3년을 다룬 이전 글들
앞서 밝혔듯 지금 회사에 오면서 이 회사에서 세 번째 입사기념일을 보내게 될 것이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물론 입사하고 한 달쯤 지난 시점에는 그렇게 예상했을 것 같다. 주위의 증언으로도, 내가 기록으로 남긴 증거로도, 그때 나는 이미 회사에 푹 빠져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참고로 아래 <회사에 취하다>는 입사하고 한 달 후 썼던 글이다.)
그 이후 회사에 애정이 생기는 다양한 순간들이 있었지만, 늘 글감으로 미뤄두고 작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회사의 문화나 구성원에게 보여주는 절대적인 신뢰가 좋았다. 믿음을 먼저 강요하기보다는 믿고 있음을 먼저 보여주는 우리 회사의 소통방식이 회사를 믿고 지지하게 하고, 또 회사를 자랑하는 이유가 됐다. 그게 가장 드러나는 것이 내가 거친 모든 회사에서 경험한 "재택근무"라는 형태와 방식의 차이였다. 재택근무로 살펴본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재택근무 시 근무지를 변경할 수 있게 되면서 워케이션을 떠나는 구성원들이 많았고, 나 역시 떠났다. 떠나고 돌아왔다가 또 떠나고, 많이도 떠났다.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사내 소식지에 담기 위한 워케이션의 경험담, 그리고 길고 장황하지만 결국 '꼭 가보세요'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