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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경 Mar 02. 2023

특별한 어른들의 위스키

우리가 미도리와 와타나베는 아니지만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이처럼 고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언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세상에 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만약 우리들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좋아한다. 그의 소설에서는 위스키를 마시는 주인공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 때문에 위스키란 특별한 어른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다. 유지혜 작가의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에서 그녀 역시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들은 왠지 비범한 인물이라는 표현을 써 마음에 쏙 들었다.


위스키는 세련된 어른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면 위스키를 마시는 밤은 이내 낭만적이다. 추운 겨울에 위스키를 온더락으로 마셔 한 번에 취기를 느끼는 걸 좋아한다. 위스키의 잔향이 내 안에 남아 매력적인 냄새를 풍기면 뭔가 야해지는 느낌이다. 대부분은 큰 얼음을 넣은 글라스에 위스키를 넣고 그 위에 깔끔한 탄산수를 채우는 하이볼을 마신다. 서울에서 마시는 하이볼은 달달한 레몬 토닉워터를 넣어 위스키보다는 토닉워터의 단 향이 입 안에 남는다. 일본의 하이볼은 위스키 그대로의 향이 느껴지고 깔끔하여 즐겨 마시고 많이 마신다. 안 취하는 것 같은데 취해 있고, 다음 날에도 취기가 몸에 남아 흐느적 댄달까. 그래서 나의 일본 여행은 언제나 숙취가 따라다닌다. 아무튼 하이보루 히토츠 구다사이..


내 기억에 위스키는 미도리와 와타나베다. 흰 눈과 위스키. 무더운 여름날의 위스키가 묻어난 얼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적인 소설 [노르웨이의 숲] 에서 남자 주인공 와타나베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사랑을 갈구 하면서 방황한다. 위스키를 마시고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미도리와 나오코 두 여자를 생각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무엇이 사랑일까. 사랑이 무엇일까. 진짜 사랑이 뭘까.


일주일 도쿄 여행의 5할은 위스키로 인해 행복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이몬 역 근처 우연히 들어간 지하에 있는 위스키 bar. 백색 양복의 회색 빛깔 머리를 무스로 단정하게 넘긴 바텐더의 현란한 칵테일 테크니션에서 그가 이 직업을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Cadiz라는 이름의 이 위스키 바는 스페인 서남부의 항구 도시 이름이라고 하는데, 어떤 연유에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혹은 그 뜻이 아닐 지도 모른다.


담배 연기와 어두운 조명, 카운터 자리에 줄지어 앉은 중년의 남녀 커플 2쌍과 그 사이에 앉은 샤프한 느낌의 서른 중후반의 남자. 안 쪽 소파 자리에는 20대 초반의 남녀가 앉았는데, 어려보이는 여자는 가슴을 많이 드러냈고, 젊은 남자는 잔뜩 세운 머리에 어떤 명품 옷을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비어 있는 나머지 소파 자리에 앉았고, 갑작스레 달라진 분위기의 그 곳에서 처음에는 긴장했던 것 같다. 드링크 메뉴가 따로 없는 위스키 바는 긴자 출신의 바텐더가 원하는 맛과 향의 칵테일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직접 만들어 주는 식이었다. 나는 평소 자주 먹는 가드파더(God Father)를, 친구는 달달하고 상큼하고 상쾌한 느낌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완전히 다른 느낌의 두 음료인데, 독한 위스키 베이스의 훈연의 향이 나는 가드파더는 서울에서 먹었던 그것에 비해 조금 더 달콤했다. 친구의 칵테일은 푸른 빛이 나는 상큼한 음료는 깔끔한 환타에 위스키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마법 같은 공간이라 생각했다. 그러면 저 바텐더는 마술사이고, 이 칵테일은 마법의 음료인거야.


위스키 바에 진열된 휘황찬란한 술을 구경하면서 언젠가 만들고 싶은 우리집 술장을 상상해봤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혼술은 하지 않기에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술을 마신다. 나와 함께 살 그 누군가와 각자의 술 취향을 존중해 술의 종류가 조화롭게 섞여 있으면 좋겠네! 달콤하게 취했으면 좋겠네!


봄 기운이 느껴지는 도쿄의 밤, 호텔과 위스키


위스키를 마시는 사람이 비범한 것이 아니라 위스키를 마시는 우리의 순간이 비범한 것이라고.

나를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솔직한 한 잔의 술. 비범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가끔씩 위스키의 멋에 기대어 살면 그만이다. 아직 마셔보지 않은, 아직 취해보지 않은 나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으므로.


유지혜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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