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그릇
아주 더운 여름에 만난 커다란 러닝화가 가져다 준 가뿐함에 대하여
올해의 더위는 가히 폭력적이라 최근에는 흉기 난동 사건이라던지 폭염으로 인한 사망 뉴스 같은 아주 나쁜 소식 마저 들린다.
아주 추운 겨울에 태어난 나는 추위에 무척이나 약하지만, 더위에는 꽤나 강한 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올해를 기점으로 더위가 무서울 수 있구나를 절절히 느낀다. 놀라운 변화다. 더위로 인해 위염까지 얻었다.
위가 약하기 때문에 추위에 약한 내가 겨울에 종종 소화불량을 겪는 건 흔한 일이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도 소화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기온도 기온이지만 사우나에 온 것 같은 강력한 습도는 진을 쏙 빼놓는다. 그럼에도 나는 강행 중이다. 그놈의 달리기를.
10월 8일. 서울 달리기 하프 마라톤을 신청 했고, 주로 홀로 대회에 참여하던 평소와는 달리 현직히는 회사에서 후원하는 대회인지라 우리 팀원들과 함께 참가하게 되었다. 혼자 하는 것보다 동료와 함께 하는 게 확실히 독려가 되긴 한다!
평소와 다름 없는 일요일이다. 오전 그림 수업이 끝나고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고 새 러닝화를 장만하고 왔다.
나란 사람은 뭔가를 사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사람인데, 대개는 그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물욕이 사라지거나 잊어버리게 되어 소비를 자제할 수 있는 편이다.
매 년 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할 때 그러니깐 대회 2달 전에 새 러닝화를 구입해서 길을 들이는 재미로 훈련을 이겨낸다.
이번에는 눈여겨 보던, 음 그러니깐 사실은 한국에서는 아직 인기 브랜드가 아닌 러닝의 근본 ‘써코니’라는 브랜드의 트라이엄프 21 모델을 구입했다.
대표적인 쿠셔닝이 뛰어난 안정화 중 하나로 훈련과 대회를 모두 커버할 수 있는 모델이자 무난한 가격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다 년간 러닝과 관련된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근본 러닝 브랜드에 호감이 생긴 것이리라. 나이키, 뉴발란스의 예쁘고 화려한 디자인 보다는. 그놈의 고프코어 무드로 트렌드로 급상승한 아식스의 멋 보다는. 정말 러닝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곤 잘 모르는 써코니가 마음에 들었다.
서울숲 골목 끝에 위치한 ‘굿러너 컴퍼니(good runner company)란 편집샵이 있다. 로드 러닝부터 트레일 러닝 관련 신발, 용품, 의류를 셀렉해놓은 곳인데, CEO를 비롯한 매장 직원들도 대개 러닝 코치 출신으로 경험과 지식이 풍부하신 분들이 추천을 잘해주신다.
브랜드와 모델을 정하고 방문했기 때문에 구매에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지만,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원분의 추천으로 원래 신던 발사이즈보다 무려 10mm를 크게 구매했다. 내 발길이가 엄지는 길고 다른 부분은 짧은 편이라 엄지 길이에 맞춰 훨씬 남게 신어야 한다는 팁을 주셨다. 이제껏 235mm에 맞춰 신었다면, 러닝화의 경우는 240mm가 정상이었던 것. 그리고 써코니라는 브랜드 특성 상 5mm 반사이즈 크게 사는 걸 추천한다고 한다.
지난 한 달 간 달리기를 하면서 괴로웠던 부분 중 하나가 발톱이 아팠던 건데, 이전에는 문제가 없다가 습해진 날씨까지 더해지면서 엄지 발톱이 빠지게 되었다.
엄지 발톱에 이어 다른 발톱들도 아무리 짧게 깎더라도 7KM 이상이 되면 발이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내 발 착지와 약해진 발톱의 문제인 지 알았는데, 아니 너무 간단하게도 러닝하기에 작은 사이즈를 신고 있었으니 피가 나고 멍이 들었던 거다.
겉보기엔 커다란 러닝화라 왠지 둔탁해보이고 발에 딱 맞게 신발을 신던 습관과는 달리 발끝이 꽤나 남아 헐렁하다.
어색하지만 왠걸. 편하다. 오늘 밤은 10KM를 달리고 왔는데, 이전처럼 발이 퉁퉁 붓지 않았다.
비약일 지도 모르겠으나,
자기 자신을 담는 그릇 또한 그럴거라고.
그 그릇이 사람일 수도.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친구일 수도. 선생님일 수도.
직업일 수도. 직장 혹은 집,동네, 취미 생활 작게는 물건일 수도.
자신을 잘 담을 수 있는 안전한 그릇을 잘 찾아 흘러 넘쳐 상처 받는 일이 없길 기도해본다! 그 그릇을 만들고 찾을 지혜를 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