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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동에 살고 잠실로 출근합니다

31살 여자 직장인의 이사 파노라마

by 시경

함박눈이 자주 내리던 2025년 2월, 1인 서울 자취 생활 12년을 끝으로 대장동 신혼집으로 이사했다. 이사하는 날은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영하 15도에 도로가 얼어있었다. 태봉산을 끼고 있는 우리 신혼집은 하얀 풍경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마산을 떠나 처음 서울을 올라왔던 2013년이 떠오른다. 경희대학교 기숙사 복도의 파란 회색빛 형광등, 2인실 우드톤 가구들. 사회학과에 다니고 뿌리염색을 자주 하지 않아 머리가 까맣고 노랗고 갈색이던 파마머리 룸메이트. 그녀와 친해졌다면 기숙사에 좀 더 머물렀겠지만, 어색한 이와 2인실을 나눠 쓰는 게 힘들어 한 학기 만에 자취로 전환했다.


경희대학교 병원 뒤, 코너 형태의 작은 9평 원룸 빌라가 첫 자취방이었다. 집 앞에 있던 진국이라는 국밥집에서 먹던 냉면은 나의 해장을 책임져줬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술을 먹고 찾아와 새벽까지 문을 두드리던 그 집은 프랑스에 교환학생을 가면서 정리하게 되었다.


남프랑스 니스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을 땐, 학교에서 소개해준 낡은 아파트에 살았다. 버스를 타고 한참 올라가는 언덕길에 있는 내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 아주 넓었다. 노랗고 파란 스트라이프 베드가 아직 눈에 선하다. 돈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음에도 해외생활의 물가에 21살의 나는 기가 죽었다. 리들에서 가능한 신선한 물건을 찾아 장을 보았고 이 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 없던 요리를 집에서 하게 되었다. 늘 감자를 삶았다. 금방 배가 꺼졌다. 카레는 나의 주식이 되었다. 47kg였던 말라깽이는 8kg가 늘어 허벅지가 탄탄해진 근육질로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선 새로 지어진 오피스텔 건물에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큰 거울에 있던 그곳에서 거울 셀카를 종종 찍었던 게 기억난다. 졸업할 때까지 그 집에 살며 취업도 했다. 집 앞에 있던 뽀르뚜아 빵집은 회기역 사거리에 있는 건강빵집으로 유명한 명물이었다. 그곳에서 사 먹던 간단한 샌드위치는 나의 점심이고 저녁이 되었다.


취업을 하고, 졸업을 하면서 회기를 떠나게 되었다. 회사와 가까운 원룸을 찾아 선정릉 역 주변의 빌라를 찾게 되었다. 이사를 도와주러 올라온 엄마와 함께 잠든 첫날 밤, 옆방 소리가 훤히 들리는 걸 깨달았다. 가벽을 세운 원룸이라 벽을 통통 쳐보니 빈 콘크리트임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헛웃음이 나왔고, 방음이 되지 않음에 매우 걱정했다. 그렇지만 젊은 나는 이겨냈다. 오히려 어느 날 실수로 벽을 다리로 세게 치게 되어 구멍을 냈다. 가벽을 세운 집주인에 복수한 것 같아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삭막한 강남에 오래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을 찾아 자양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다. 그 뒤로 자양동에서만 7년을 있었으니 서울에서 내 시간의 반은 구의고 성수였다. 성수동이 지금만큼 복잡해지기 전에 한산하고 편안했던 때에 자전거를 타고 커피를 마시러 갔던 좋은 날들이었다. 건대 호수와 한강 공원과 어린이대공원을 새벽이고 밤이고 낮이고, 꽃이 핀 봄, 신록의 여름, 낙엽 진 가을, 눈 덮인 겨울에도 뛰어다녔던 영롱한 기억들이 조각조각 남아있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이어령 선생님의 책에 나오는 이 치명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나라는 개체는 장소를 옮겨가며 마주한 경험들의 총체로 만들어진 경험 그 자체다. 그 장소마다 내 존재의 색깔이 다르다. 회기에선 노란색이고, 강남에선 회색이고, 자양동에선 녹색이다. 그 안에서 가장 좋은 나는 자양동에서의 나. 연두에서 녹색으로 변한 나 자신이다. 20대의 성숙을 겪은 자양동을 떠나 결혼을 하고 서울이 아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정착했다.


분당구에서도 서판교, 도시개발 사업 특혜 의혹으로 유명한 그 대장동에 살게 되었다. 우리 집은 대장동에서도 가장 안쪽 언덕에 있는 아파트이다. 여름밤에는 개구리 소리가 잘 들리고, 바깥공기에서 상쾌함이 느껴진다. 깨끗한 신축 아파트 건물들과 잘 관리된 조경으로 고급스러운 타운 하우스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주민이 많지 않은 만큼 상가도 많지 않아 주변에 외식할 곳이나 카페 같은 곳이 많진 않지만 한적해서 좋다.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캐스퍼 차를 계약했다. 하지만 긴 대기로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늦게 차가 나오게 되어 올해까진 땀 흘리는 뚜벅이 신세다. 회사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린다. 집 앞의 버스 정류장에서 판교역까지 20분에서 30분가량 버스를 타고, 신분당선을 타고 강남역에 간 다음 2호선으로 갈아타고 잠실로 간다. 출근도 퇴근도 먼 여정이다. 이사 온 지 초반에는 적응이 힘들어 무척이나 피곤하고 불만스러웠다. PT를 시작하면서 체력이 좋아져 이젠 할 만하다고 느껴진다. 사람은 적응하기 마련인가 보다.


자동차 크랙션 소리 하나 없이, 술 취한 사람들의 고성방가 없이, 귀뚜라미와 개구리 소리가 들리는 대장동의 여름밤이 참 좋다. 일요일 저녁 푹신한 소파에 남편과 함께 비스듬히 누워 이야기하고 노는 시간이 소중하다. 대장동에서 만들어 갈 내 삶의 색깔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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