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너머 꿈을 봐야 합니다
문학박사가 될래요
아마 제가 국민학교 4학년때 였죠
6.25 중 이었는데 우리집에 군인들이 파견 나와 있었어요
몇달 동안을 군인아저씨들과 함께 지내며 있었는데
제가 책읽는 모습을 보시곤
대뜸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구요
너는 법학박사랑 문학박사 중에
무슨 박사하고 싶어?
사실 그때는 박사라는 게 뭔지도 몰랐지만
책을 좋아했던 터라 그렇게 말이 나오더라구요
저는 문학박사를 할래요
그리고 그 고백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는지
감사하게도 문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국어선생님으로 오십 평생을 살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까
만 17살에 대학교에 입학하게 됬어요
최연소라는 타이틀을 달면서
그런데 그게 저에게는
참...콤플렉스로 다가오더라구요
최연소 학생의 오기
살면서 콤플렉스라는 걸 처음 느꼈던게
동기들하고 보통 3살 정도가 차이가 나니까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드는걸 발견 했어요
특히, 우리나라처럼 나이가 중요한 사회에서
세살차이는 당시 적은편이 아니었죠
그래서 "오기"랄까요?
남자들의 세계에서 나이차를 극복할 수 있는게 뭘까?
고민에 고민을 하다보니 결국 이게 나오더라구요
아는 것으로 승부해보자
그래서 그때부터 철학책을 독파하기 시작했어요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의미가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시간이었죠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이런 다짐을 품었던 것 같아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말자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하니까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친구들과도 많은 토론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곤 생각해 낸게 "농촌계몽운동"이었죠
국문학과 학생으로서 사회를 직접 변화시킬 수 있는 일
함께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보자는 신념으로
마음맞는 친구들과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어요
지역에 계신분들과 말그대로
동거동락하면서 글을 가르치고
새로운 농사법도 가르치고 했던 것 같아요
교직, 새로운 인생의 시작
군대를 갔다오니
<재건 국민운동본부>라는 기관이 없어졌어요
그렇다면 이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
고민을 하던 끝에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추억들이 많이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생각을 했죠
그래, 계몽운동을 했던 것처럼 교직에 몸 담아보자
신흥고등학교로 1968년 처음 부임을 하는데
같은 날 저말고 새로 부임하는 선생님이 더 계신다고 하더라구요
여자분이셨는데 특이하게도 체육선생님이셨어요
그분도 초임이었던 터라
문서나 학교 체계에 대해서는 좀 서투셨죠
부임 동기였던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응원해주곤 했는데요
그 분이 결국엔 제 아내가 됩니다
부임한지 일년만에요
벌써 인연을 맺은지 50년이 넘어가요
돌아보면 어쩜 그런 인연이 있었는지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해주셨는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참 많이 느껴요
성장을 통해 누리는 기쁨
당시, 고등학교는 평준화가 되지 않아서
어려운 형편에도 집안을 일으키겠다고
지방에서 도시로 온 친구들이 참 많았어요
누나네 단칸방에 살면서
밤에는 염천교에서 구두를 팔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
호빵장사를 하거나 남대문 야간경비를 하면서
낮에는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있었죠
나중에는 사법고시를 합격해서
대법관까지 갔다는 친구의 소식
검사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 흐믓했던 기억이 있어요
1994년 6월 당시 개포고등학교에 있었는데
처음보는 목사님께서 점심시간에 찾아 오셧어요
안산에 기독교 고등학교를 설립하려고 한다
함께 도움이 되어 달라
그런데 저는 안산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김인중 목사님도 그때 처음 뵈었던 거에요
어떻게 절 찾아오셨냐 라고 여쭤보니
7천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을 받아서 왔다고 하시는데
정말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더라구요
아마도 다른 사람 같으면
사양했을 법한 자리였는데
목사님의 영적인 권위에
저도 모르게 압도 되더라구요
게다가 일반 기독교 학교가 아닌
전혀 새로운 학교를 만들어 보자는 제안에
저 역시도 마음이 동하는 것 같았어요
장인어른이 장로님이신데
그날 저녁 바로 상의를 드렸죠
어떻게 하는게 맞을까요
장인어른께서 대뜸 그러시더라구요
당장 가라고
새로운 기독교 학교
갔더니 학교는 골조만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죠
식당도 주변에 없어서 공사장 분들과 함께
함바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업무해야하는 상황이었구요
저는 동산고등학교 운영에 대해 계획하기 시작했어요
다음년도 학생들을 유치해야 했기 때문이죠
안산은 그때 당시 비평준화였기 때문에
1등급은 어디학교 2등급은 어디학교를 가야한다는 불문율이 있었어요
신설학교였던 저희학교는 말그대로 기존 고등학교들 텃세에 밀려
학생들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갈피도 못잡는 상황이었죠
학생을 유치하기 위해
안산 전역을 다 다녔던 것 같아요
길도 형편 없었지만
선생님도 별로 없으니 저 혼자 다니면서 고생을 많이 했죠
중학교에 학교원서하고 브로슈어를 가지고 갔는데
외판원 취급을 하는거에요
아래위로 처다보면서 거기다 놓고 가세요 하면서
나가면서 보니 구석으로 밀어 넣더라구요
그 모습에 속도 상하고
혼자 눈물도 많이 삭히기도 했었죠
사실 맘고생을 말도 못하게 했어요
그 나이에 원형탈모증까지 생기기도 했으니까
너무나 감사한 친구들이었어요
하지만 성적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죠
그래서 더 의욕을 가지고
설립멤버 선생님과 정말 의샤의샤 했던 것 같아요
저희들의 목표는
"우리 5년만 보고 정말 열심히 길러 냅시다" 였어요
그런데 3년만에 평균 105점으로 입학했던 그 친구들이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주더라구요
4년제 대학교에 517명이나 합격하게 된거에요
아무것도 없는 신설 학교인데 말그대로 기적이 일어난거죠
교육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바뀌면 안되죠
저희는 그 본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교육을 했던 것 같아요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거기에 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육의 본질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란
섬기고 나누고 베푸고 돌보는 것을 의미하죠
이런 가치를 학교에서
성장기에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해요
아니 인생에서 보면 그때 외에는 없어요
그런 가치를 마음으로 경험한다는게
그래서 선생님들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을 생활화 시키는 것을 고민을 했죠
그래서 나온 우리학교 캐치프레이즈가 <미인대칭>이에요
미소, 인사, 대화, 칭찬
3년 동안 이 4가지를 프로그램화 해서
아이들에게 훈련시키며
임팩트를 남기고자 노력했어요
꿈 너머의 꿈
학교를 다니면서
꿈이 없다는 학생들이 많이 봅니다
아이돌이나 유튜버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며
골몰해 있는 친구들도 보구요
막상 대학을 나와도 뭘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며 절망하는 청년들도 많이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된 것은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겪는
세대의 아픔이라고 생각해요
즉, 1차적인 교육만 받았기 때문에
꿈이란 것도 직업으로 한정시키게 된 것이구요
꿈을 취미나 적성에 한정시키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 거죠
진정 꿈다운 꿈이란
"꿈 너머의 꿈"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꿈 너머의 꿈"은 무엇이냐
돈, 명예, 권력 같이 자신이 성취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으로
남을 섬기고 베풀고 돌보는 것이에요
그를 통해서 이지러진 삶의 가치를 세우는 과정은 결국
소위 직업이라는 첫번째 꿈을
인생의 빛으로 다가가게 만들꺼에요
그렇게 나다운 삶을 통해
의미있는 성장과 즐거움을 느끼게 될 겁니다
Q. 청년을 위한 DREAM 매뉴얼
인생은 만남이에요
그렇기에 좋은 가치관을 심고
삶의 가치를 세우는
좋은 만남을 이뤄가야 해요
그래서 성공이란
"오만한 나" 가 아닌
"섬기는 빛" 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