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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을 May 28. 2024

내면을 비치는 거울 '표정'

[잡담술집] 5화

고풍스러운 나무 시계 시침은 ‘XI’를 가리키고 있었다. 4년 전 로마로 배낭여행을 떠났던 젝슨이 한눈에 반해 상당한 값을 주고 구입한 어두운 갈색 계열의 나무 시계였다.


젝스는 시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벌써 11시네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매주 금요일 11시만 되면 오시는 단체 손님이 있어요. 이것저것 많이 주문해 주셔서 매출이 오르긴 하지만, 그만큼 바빠지니까요."

젝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경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목젖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6명이요."

그녀의 뒤로 남자 3명, 여자 2명이 잇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나무통에 우산을 넣으며 발판에 발을 가볍게 두들겼다. 우산에 딸려 들어온 빗물은 아래로 흘러 나무통을 묵직하게 만들었다.

"어서 오세요. 단체석은 이쪽입니다."


젝스는 그에게 눈을 마주쳐 웃어 보이고 자리를 옮겼다. 입구에서부터 들려오는 무리의 대화를 통해 그들은 대학교 음악 동호회 모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젝스는 다소 활기찬 그들을 구석진 자리로 안내해 그의 여유로운 시간을 방해하지 않게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넓게 트인 창문을 바라보았다. 비는 금세 그친 모양이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날씨 탓에 사람들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밤 11시 늦은 밤, 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뒤로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턱을 괴고 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얼굴을 일구고 서로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다투는 연인도 있었고, 늦게까지 일하고 퇴근한 남편을 마중하려 딸과 함께 길가에 서성이는 모녀도 있었다. 모퉁이를 돌고 등장한 아빠에게 딸이 달려가 안기고 남편의 목에 목도리를 두르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어졌다.


그들이 자리를 떠나고 다시 그의 앞으로 5명, 10명, 20명이 스쳐 지나갔다.

다투던 연인처럼 얼굴을 일구고 걸어가는 사람, 남편 그리고 아빠를 기다리던 모녀처럼 설렘이 가득해 보이는 사람,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 모자로 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단 몇 초 만으로 그 사람의 상황과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표정과 걸음걸이는 그 사람의 내부를 비치는 듯했다.

그는 순간 자신은 어떤 모습으로 타인에게 비춰질지 궁금했다. 행복한 모습으로 비춰보이고 싶어 입꼬리를 들어 억지로 웃어보았다.


그때 혼자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외국인이 눈에 들어왔다. 핫팩으로 손을 데우고 있었다.

'볼거리라곤 하나 없는 동네에 무슨 일로 여행 온 걸까'  

외국인은 가게 앞에 서서 핸드폰을 열심히 두드렸다. 아마 길을 찾는 모양이었다.


외국인이 다시 발걸음을 때려할 때 창문 너머로 지켜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외국인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Hi'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도 외국인을 따라 웃으며 인사했다. 외국인은 그대로 방향을 틀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의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렸다. 지켜보고 있던 걸 들통난 것 같아서 이기도 했지만 모르는 사람의 환한 인사는 오랜만에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잔을 들어 긴장을 녹였다. 그리고 내려놓는 잔과 함께 일렁이는 위스키 위로 외국인의 표정과 미소를 떠올렸다.

타지라 힘들고, 혼자라 외롭고, 날씨 탓에 추울 텐데도 외국인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했다. 상황과는 반대되는 외국인의 미소가 그의 마음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닌,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지은 표정이 아니었어. 몸 안의 여유가 흘러 몸 밖으로 표출된 거였어."

그는 흐리다가도 또렷해지고, 또렷해지다가도 흐려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표정은 연기로 되는 게 아니었구나. 내면을 정비하면 표정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였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흔들림 없이 선명해 지려 할 때 그의 시야로 큰 느릅나무가 보였다. 우직한 나무 아래에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긴 장발의 검은색 머리, 검은색 코트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는 갈색 치마. 그녀의 입에선 담배 연기인지, 입김인지 모를 안개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외투의 보온 성능이 좋지 않은지 그녀의 양 볼은 핑크빛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곧 술집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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