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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경 emb Jun 10. 2023

"제발 날 보지 마, 날 향하지 마"

이랑 - 신의 놀이



"최근 교제 폭력에 교제 살인까지 터져나오지만 경찰은 피해자 상당수가 보호 조치를 원하지 않아 추가 대처를 하기 어렵다고 해명합니다. 그런데 피해자들은 왜 보호 조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000 기자가 보도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못 만들지만 좋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나는 가끔 일터에서 '꼭 전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야기를 불현듯 생각한 뒤 2분짜리 영상을 만든다.

그런 영상을 만들 땐 준비 단계부터 유독 통계 자료와 데이터를 꼼꼼히 뒤진다.

기사를 쓸 땐 표현과 문장을 가지고 혼자 고군분투한다.

예컨대 아무도 눈치 못 챌 것 같은,  '꺼린다'라는 표현과 '피한다'는 단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 중 어느 걸 선택해 쓸 지를 놓고 30분씩 고민하고 있는 식이다.



그러나 애정은 사랑을 보장하지 않듯 이런 리포트의 반응은 대부분 시큰둥하다.

좋다-좋지 못하다를 따질 수가 없는 영역. 그러니까 이렇게 공을 들인 리포트는 언제부터인가 '괜찮은' 기사의 기준이 되어버린 댓글이나 조회수가 잘 나오지 않는다.

욕도 안 먹고 잊혀지는 무관심의 세계의 작고 귀여운 조회수를 가만히 보다가 내가 쓴 다른 기사를 스크리닝 해본다.


부산의 어느 지역에서 갑자기 바바리맨이 나와 여고생을 성추행했다는 석 줄짜리 단신 기사.

만취한 남자 세 명이 음식값 십 몇만원을 내고 가지 않았다는 한탄.

윗집 강아지가 하도 짖어대서 시작된 이웃간 갈등이 칼부림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유명 연예인이 알고 보니 1종의, 3종의, 5종의, 7종의 마약을 했다는 숨가쁜 전달.

2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쉽게 쓰여진 글들.


이런 것들은 애정을 가지고 만든 2분짜리 영상보다 몇백 배의 인기를 얻고 몇천 개의 댓글을 먹는다.

현실을 보다 보면 사실 조금은 씁쓸해진다.

내가 부족했다는 반성과 함께 어떻게 하면 나아질 수 있을 지에 대한 막막함 사이에서, 조금의 좌절과 상당한 혼란스러움이 몰아친다.


그러나 그럼에도 지긋지긋하게도, 어쩔 수 없는 각성의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시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생겨버리는, 좌절할 게 뻔할 걸 알면서도 '꼭 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이야기가 탄생하는 순간들.





며칠 전 밤 11시쯤 여의도의 한 골목을 걷다가 눈빛이 불안한 한 정장 차림의 남자를 보았다.

술에 취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게 가만히 서있던 남자.

자기 앞을 스쳐 지나간 한 비즈니스 캐쥬얼의 여성을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명확히 그 여자를 향해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캐주얼의 여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때로는 여자를 겨냥한 손짓까지 덧대가면서.



그러자 평범히 길을 걷던 여자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대로 쪽으로 향했다.

마침 마주 오던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세웠고 얼른 뒷자석 문을 열었다.

택시에 몸을 싣기 전 여자는 두려움이 녹은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0.5초도 되지 않는 시선을 남긴 채 여자는 택시 안으로 사라졌다.

눈빛이 불안한 남자는 약 3초에서 5초 동안 여자가 타고 있는 택시의 트렁크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고개를 숙인 내가 처음으로 그러나 간절히 가진 생각은 단지 이것이었다.

"제발 날 보지 마, 날 향하지 마, 날 대상으로 삼지 마, 날 겨냥하지 마."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움도 모른 채 남자의 불안한 눈빛이 그 여자에 이어 나를 향하지만 않으면 좋겠다는, 차라리 딴 사람을 타깃으로 삼아 달라는 그런 저열한 생각을 해버린 것이다.

그 여자가 느낀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하면서도 감히 살고 싶어서. 혹시 모르니까.


그 때 내 머릿속에는 하도 많아 셀 수도 없는 숱한 교제폭력 뉴스와 함께,

더 수없이 직접 느낀 한밤중 골목길 날 따라오는 발걸음의 공포와,

이별을 통보받고 미친듯이 화를 냈던 전 남자친구가 혹시라도 귀가길을 덮치지 않을까 후추 스프레이를 사서 들고 다녔던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재생됐으니까.


그러니 결국은 생각한다. 댓글도 조회수도 나오지 않아도 묵묵히 전해야 할 이야기는 있다고.

여전히 어딘가의 사람들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함께 고개를 끄덕이거나 분노할 수 있는 이야기,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매일이 아니어도 좋다.

바바리맨과 성추행과 유명 연예인의 마약 이야기를 써내야 하는 일상일지라도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자는 발랄한 생각과 의지를 끝까지 잃지 않고 싶다.

저열한 생각과 부끄러운 무의식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다.

그런 이기적인 소원을 품어 좌절을 이겨내고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때로는 사막에 내던져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시나요

좋은 이야기가 있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그 좋은 이야기에 대한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나요

요즘도 무섭게 일어나는 일들을 마주하고 계시는가요

중년의 나이에도 절망과 좌절의 무게는 항상 같은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만난 것 같은 이야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그들의 옆자리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나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 신의 놀이를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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