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생 ‘킴’의 만찬

해피 드래건

by 세상 사람


학생 때 차이니즈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꽤 오래 했다. 유학 시절 알바로 말할 것 같으면, 시각장애인을 위해 대신 노트필기해주는 일, 한인교회 예배 피아노 반주, 카센터 유리창에 페인트로 세일 문구 적는 일, 옷가게 점원, 스시 레스토랑 서빙, 한인 신문사 편집 일, 메뉴판 디자인, 한국어 튜터 등등을 했는데 단연 ‘해피 드래건’—그 중식당 이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집에서 20분 정도는 운전해야 갈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식당으로,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잠깐 들러 쪽잠을 자다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출근하던 기억이 난다. 빨간색과 짙은 녹색 두 종류의 로고가 찍힌 티셔츠였다. 출근하면 내 성(last name) “Kim”이 적힌 타임카드를 찍고, 퇴근할 때 다시 타임카드를 찍는다. 어떤 이유에선지 한국인 사장님도 나를 이름 대신 “김아-”라고 부르셨다.

그 식당은 사장님은 한국인, 주방장은 멕시코인이던, 미국식 중국 식당이었다(응?). 4인용 테이블이 열 개 이상 있는 꽤 널찍한 곳으로 take-out과 dine-in이 모두 가능한 식당이었다. 미국 영화에 흔히 주인공이 중국음식을 테이크 아웃해다가 볶은 국수나 껍질콩 같은 걸 박스 채로 들고 서툰 젓가락질로 집어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런 (한 면이 역사다리 꼴인) 흰색 종이 박스에 포장을 했다. 전화 주문이 많았다. 전화받을 때 하던 “Happy Dragon. How can I help you?”라는 인사말이 하도 입에 붙어서 나중에 다른 데서 전화를 받다가 나도 모르게 그 말을 뱉는 바람에 아차 했던 적도 있다.


홀에서 먹는 손님의 경우에도 주문은 카운터에서 받았다. 테이블에 세울 수 있는 빨간색 플라스틱 번호표를 손님에게 주고, 주문표에 번호를 적어 주방으로 넘긴 후 음식이 나오면 해당 번호의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것까지가 내 일. 음료는 패스트푸드점처럼 손님이 직접 디스펜서에서 받아 마시는 형태였기 때문에 다른 레스토랑에서처럼 식사 중간중간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보러 다닐 필요는 없었다. (그런 서비스가 없는 대신 팁이 적었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말 붙이는 걸 즐기지 않는 나한테는 알맞은 일이었다.) 손님이 다 먹고 나가면 테이블을 치우고 접시를 헹궈 설거지 기계를 돌렸다. 영업시간이 끝나면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냅킨, 소스, 포장박스 같은 걸 채운 뒤 정산을 하면 일이 끝났다.








주방장의 이름은 ‘나초’였다. (원래는 이그나시오 Ignacio로 멕시코에서는 그 이름을 으레 나초라는 애칭으로 부르는가 보다. 영화 <나초 리브레>에서도, 미드 <베터 콜 사울>에서도 이그나시오는 나초라고 불린다.) 당시 내가 스물네댓, 나초는 나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아래라고 들었는데 결혼해서 아기도 있던 걸로 기억한다. 저녁 타임 일을 할 때는 보통 손님이 없는 틈을 타 눈치껏 나초에게 저녁을 부탁해 홀 구석 테이블에 앉아 먹고는 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채소, 고기, 면을 특제소스와 함께 볶은 ‘차우 메인 Chow Mein’을 먹었다. 고기는 치킨, 비프, 쉬림프 중에 고르거나 베지터블만 넣어도 된다. 다른 메뉴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면이 제일 먹기 편하고 나는 워낙 면 러버니까.

나초가 주방 관리며 조리며 척척 잘하긴 하는데 손이 좀 큰 편이라고, 사람 좋은 사장님 부부가 그 점에 대해서만큼은 몇 번 탐탁지 않아하신 것도 같다. 내가 먹을 밥도 자꾸 어른 둘은 너끈히 먹을 만큼 담아주어서, 나는 늘 “나초, 반만 해 줄 수 있어? 반만!” 하고 강조했다.


어릴 때 좋아하던 『문선사 현대세계걸작 그림동화』 시리즈 중, 주문을 외면 맛있는 파스타를 만들어 내는 요술 냄비가 나오는 ‘마법사 노나 할머니’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조수 안토니는 요술 냄비에 손대지 말라는 노나의 당부에도 불구,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주문을 외워 파스타를 만들어 동네방네 나눠 주고는 인기를 끈다. 하지만 멈추는 법을 몰라 온 마을을 국수로 덮어 버리고 마는데…. 돌아온 노나 할머니는 상황을 수습하고 안토니를 용서해 주는 대신 마을에 퍼진 파스타를 다 먹으라는 벌을 내린다.


나초가 만들어 준 차우 메인 접시를 받아 들 때면 그 동화에 등장하는, 마을을 뒤덮은 국수 그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중에는 일부러 작은 보울을 건네면서 요만큼만 해 달라고 말해 봤지만 면적이 좁아진 대신 어찌나 위로 수북하게 담아 주는지. 남기면 그만이기야 하지만 먹다 보면 또 다 먹게 되는 것이, 한참 서서 일하는 중에는 나로서도 허기가 지고 차우 메인은 맛있는 데다 나는 워낙 면 러버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거기서 일할 때 내 평생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가고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가장 빠른 속도로 한 끼에 먹어 치운 것 같다. 지금도 어쩌다 한 번씩 차우 메인을 비롯하여 쿵파오 치킨, 핫 앤 사워 수프, 크랩 랭군 등 ‘Happy Dragon’의 메뉴를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한국에는 그런 류—미국화된 퓨전 중국요리인데 ‘P.F. Chang’s’ 같은 고급 레스토랑도, 그렇다고 ‘Panda Express’ 같은 패스트푸드도 아닌 중간 어디쯤—의 중식당이 잘 없기도 하거니와 흡사한 메뉴가 있다 해도 그곳만의 소스와는 질감이 달라 느낌이 안 날 것이다.

한편으로는 비슷한 재료를 갖춰 만든다 한들 그 맛과 같으려나 싶은 의구심도 든다. 집에서 국수든 뭐든 곧잘 볶아 먹지만 이건 좀 다른 범주랄까. 질리도록 먹었는데 끝내 질리지 않은 그 무언가. 그것은 나초가 또 한 솥을 볶았어, 하며 별수 없이 받아 들고 구석 테이블로 가지고 가 손님 들어올까 눈치 보는 와중에도 칠리소스 뿌려가며 한 그릇을 싹 비우던, 스물네댓 살이던 알바생 ‘킴’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맛이니까.



Seine


keyword
이전 13화평온히, 내 속도로, 필요한 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