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너무 길지만

마지막 식사

by 세상 사람


죽기 전 마지막 식사 메뉴를 택할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 먹고 싶을까. 당장 몇몇 후보가 머릿속을 채운다. 잠깐, 이제 정말 죽는 거니까 딱 한 가지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너무 야박한데.








살면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뜨거우면서 동시에 맵기까지 하면 잘 못 먹는 편이라 짬뽕은 애초에 잘 먹는 음식이 아니기 때문. 평소에는 짜장면을, 비가 오는 날이거나 짬뽕이 맛있는 집이라면 짬뽕을, 그게 아니면 볶음밥 찬스도 있다. 그러나 차가운 면 음식의 세계에서 늘 당면하는 ‘물’과 ‘비빔’ 간의 선택, 이것은 언제나 숙제다. 대표적으로 냉면. 평양냉면집이야 삼삼한 육수 즐기러 가는 거니 웬만하면 물냉면을 시킨다지만 그 외 함흥냉면집이나 고깃집에서는 같은 기로에 서기 일쑤다. 고민 끝에 물냉을 시키면 마지막에 가서는 몸이 오들오들, 그렇다고 비냉을 시키면 자극적인 양념 탓에 입안이 텁텁. 그러니 생의 마지막 식사에서는 물과 비빔 두 가지를 다 반반씩 즐기길 원한다. 이때 비빔냉면에는 홍어회나 가자미회 무침을 토핑으로 추가하고 싶다.

하지만 다양한 냉면의 장르 중에서도 어찌 하나만 고를 수 있을까. 평양식으로 알려진 특유의 밍밍하고 맑은 육수에 만 부드럽게 끊기는 메밀 냉면도 매력적이지만, 실타래처럼 동그랗게 말아 놓은 반투명의 면발이 몹시 얇아 씹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이 호록 호록 스치듯 들어가는 쫄깃한 전분 냉면도 포기할 수 없다. 딱 한 번 진주에 갔다가 먹어 본, 해물 넣은 육수에 고명으로 육전이 올라가는 냉면 계의 잡채 진주냉면은 또 어떻고. 비단 냉면만의 문제가 아니다.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동치미 국물에 만 냉국수는. 어릴 때 우리 집 단골 야식 메뉴였던 김치비빔국수는. 근래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보고 따라 해 봤다가 홀딱 반해버린 들기름 막국수*는 어쩌나.

* 들기름 가지볶음을 같이 해서 토핑으로 곁들였더니 좋길래 이 역시 [호마특선]으로 등극.








게다가 차가운 면만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혼자 밥 해 먹고 살 때 밥보다 면을 더 자주 먹었을 정도로 면식 수행자였던 나는 집에 쌀은 떨어져도 건조면 한두 종류는 늘 찬장에 두었다. 가장 대표 격인 두 가지 메뉴가 소면으로 만든 ‘수란 국수’와 스파게티로 만든 ‘마늘 볶음면’이다. 특별할 것 하나 없지만 나에게만은 핵심적인, 익숙하면서 배신하지 않는, 그런 음식들.

‘수란 국수’는 냄비 두 개에 물을 끓여 한쪽에는 면을 삶고 다른 쪽에는 육수를 내면서 요리를 시작한다. 멸치와 다시마를 끓이다가 국물이 우러나면 건지되 다시마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고명으로 곁들여도 된다. 육수에는 양파와 파를 썰어 넣고 애호박이나 버섯 같은 다른 채소가 있는 날에는 그것도 넣는다. 다진 마늘을 넣고 간은 간장으로 하는데, 따로 양념장을 만들 거라 싱겁게 한다.


양념장은 다진 파, 마늘, 매운 고추, 고춧가루, 설탕, 깨소금, 참기름을 넣어 걸쭉하게 비빈다. 육수 냄비는 면과 양념장이 다 준비될 때까지 약불에 올려 두고 온기를 유지하면서, 적당한 때에 달걀 하나를 조심히 떨어뜨려 수란을 만든다. 너무 일찍 넣어 놓으면 반숙의 묘미를 놓치게 되므로 후반에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큼직한 그릇에 면을 담고, 수란이 든 냄비를 기울여 모든 재료가 국수 위에 살포시 올라가도록 살살 국물을 붓는다. 티스푼으로 양념장을 끼얹어 가며 맛있게 국수를 먹는다. 수란은 젓가락으로 터뜨려 노른자에 면을 찍어 먹어도 되고, 양념장을 얹어 한입에 먹어도 된다.

‘마늘 볶음면’은 볶음국수에 붙인 별칭이다. 단추 하나에서 시작하는 그림동화 <단추로 끓인 수프>처럼 일단 출발은 마늘에서 한다. 준비물은 국수 삶을 냄비와 재료 볶을 프라이팬. 면은 스파게티나 링귀니를 자주 쓰고 기본 간은 간장과 설탕(또는 올리고당)으로 한다. 냄비에 면을 삶는 동안 팬에 기름을 두르고 마늘을 비롯, 모든 재료를 볶아 준비해 두었다가, 나중에 면을 건져 넣고 휘휘 섞듯 볶아 마무리한다.


(‘내 손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편에 적은 것처럼) 처음에는 햄 또는 베이컨과 양배추, 양파만 넣었는데 차차 다양한 재료의 콤비네이션을 시도했다. 마늘을 볶을 때 고춧가루를 조금 넣어 마늘 고추기름을 만든 뒤 차돌박이와 길게 썬 청홍고추나 피망, 양파나 파를 넣고 볶으면 고추잡채 기분이 난다. 청경채, 브로콜리, 버섯, 견과 같은 재료만으로 채식을 할 수도 있고, 배추 한 가지와 달걀의 조합도 좋다. 햄이면 햄, 소시지면 소시지 다 좋고, 어울리겠다 싶은 채소와 함께 볶기만 하면 된다. 이건 비밀인데, 혼자 있을 때 마늘 볶음면을 만들면 꼭 1인분이 넘더라?








그럼 마지막 끼니는 뭐가 되었든 ‘면’이면 되려나. 결론을 지으려니까 떠오르는 음식이 하나 더 있다. 따끈하게 녹인 버터에 푹 찍은 랍스터 테일도, 참숯에 구운 육즙 가득한 한우 꽃등심도 아닌(이라고 쓰다가 랍스터와 꽃등심이 더 나은가 잠시 고민하긴 함), 바로 부침개다. 충분한 양의 식용유, 노련한 뒤집기 기술, 완성될 때까지 불 앞을 지키는 지구력이 필요한 요리.

어린 시절에는 ‘부침개’라고 하면 부추를 썰어 넣어 얇게 부친 것을 주로 떠올렸다. 오징어를 보태거나 김치 따위로 주재료를 바꿀 수는 있겠지만 두께의 디폴트 값은 엄마의 부추 부침개로 세팅되어 있다. 밖에서 사 먹는 두꺼운 해물파전은 왠지 같은 음식이 아닌 것 같아, 나에게 부침개란 ‘얇게’ 부쳐야 제맛인 요리다. 속까지 균일하게 익고, 젓가락으로 쉽게 찢을 수 있는 정도의 두께가 좋다.

기름에 튀기듯 지져진 바삭한 가장자리를 뜯어먹는 재미, 부드러운 반죽 속에 스민 향긋한 채소의 맛, 어느 틈에 숨어 있다 불현듯 눈물이 핑 돌게 하지만 안 넣으면 서운한 청양고추의 묘미. 그런 점들에 매료되었는지 한때 다른 건 몰라도 부침개만큼은 손수 잘 부쳐 먹어야겠다는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아무렇게나 섞어 양면을 잘 익히기만 하면 되는 일 같지만, 알맞은 반죽 농도를 맞추고 잘 펼치는 기술, 적당한 양의 식용유를 두르고 필요한 타이밍에 추가하는 기술, 찢어지지 않게 뒤집는 기술, 특히 부침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손목 스냅을 이용한 공중 플립까지 연마하려면 어느 정도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혼자 하면 재미없는 요리이기도 하다. 막 프라이팬을 떠난 둥근 부침개가 우아하게 제 몸을 뒤집어 다시 팬 위에 무사히 안착하는 순간을 나 혼자만 본다면, 부침개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뭐든 튀기면 맛있다고 하는데, 부쳐도 다 맛있다. 부추와 김치뿐 아니라 감자, 애호박, 파래, 해물, 깻잎, 그리고 상추까지. 그렇지만 내가 부침개를 좋아하는 건 맛 때문만은 아니다. 부침개를 부칠 때 생각나는 분위기가 있다. 커다란 양푼, 밀가루에 섞이는 송송 썰은 재료들, 엄마의 손에 지글지글 구워지는 반죽, 접시에 오른 첫 장을 온 식구가 맛보는 순간.

“어때? 조금 싱겁냐?”

“아니, 맛있어. 간장 찍으면 딱 맞아.”

그리고 다음 장, 또 다음 장, 모두가 양껏 먹어도 줄지 않을 것처럼 접시에 쌓이는 얇은 부침개 탑. 내가 하고 싶었던 건 공중 플립이 아니라 그거였는지도 모른다. 능란하게 부침개를 구워 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는지도.








마지막 날이 정말로 온다면 이것들을 한 번에 먹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때가 되면 소화력도, 식욕도, 기억도 지금과 같지 않겠지(특히 소화력). 나중에 먹고 싶은 음식을 미리 정해놓을 여력이 있다면 미루지 말고 오늘 해 먹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니, 앞날까지 생각할 여유라고는 남아 있지 않은 어떤 날이라도, 주어진 하루치의 허기만큼은 스스로 달래는 것. 그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생은 때로 너무나 길게 느껴져 버겁지만, 매일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어쩌면 그날 하루치의 용기*가 아닐까. 귀찮음과 고단함을 조금만 이겨내고 냄비를, 혹은 프라이팬을 불에 올릴 만큼의 기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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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쓰기 시작한 이 에세이의 제목에 관한 TMI.
90년대 장혜진의 노래 <1994년 어느 늦은 밤>의 한 구절처럼, 한참을 노래에 '겁이 날 만큼 미쳤었'던 때가 있었다. 가사를 쓰고, 노래로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부르고.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만으로 부족한 실력으로도 부끄러워 않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쓰는 것 부르는 것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졌고, 그게 꽤 힘들었다. 꽤 한참.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던 어느 날, 사전에서 단어를 하나씩 찾아 그거라도 블로그에 적기로 했다. 처음에는 뭐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뜻을 찾아 적다 보니 새삼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100일 동안 찾은 백 개의 단어 중 ‘소용’이라는 낱말이 있었다. 원래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할 때의 그 소용을 찾으려던 것이었으나 뜻밖에 ‘소용小勇’, ‘작은 용기’라는 뜻을 보게 되었다. 사전에는 ‘한 사람을 대적할 정도의 용맹’, ‘하찮은 일로 솟는 소소한 용기’라는 풀이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바로 이것, ‘하루를 살아갈 만큼의 용기‘였구나,라고.



S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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