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제적 습관

진실

by 세상 사람


안 좋은 습관을 얘기해 보겠다.


몇 년 전 공연에서 만난 한 친구와 술을 마시고 주점에다 가방을 두고 온 적이 있다. 술에 흠뻑 취해 하루종일 둘러업고 다니던 기타만 용케 짊어지고 나온 모양으로 아침에 눈을 떠 보니 가방의 행방이 묘연했다. 분실물이 기타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주점에 확인은 해봐야지 싶어 전화를 걸었는데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가방 같은 건 없는데요”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찾아봐 달라는 메모를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 다시 연락이 왔다. '가방이 있으니 찾으러 오라'고. 평소에 현금을 잘 안 갖고 다니기에 그날따라 가방 속주머니에 넣었던 만 원짜리 몇 장을 또렷이 기억했다. 없다는 가방을 다시 찾아내 준 게 고마워 근처 빵집에서 밤식빵을 사가지고 갔더니, 주인아저씨가 아주 친절하게 웃으며 가방을 돌려주길래 연신 “고맙습니다” 하며 빵을 건네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가방 속을 들춰 보고 만 원짜리는커녕 천 원 한 장도 남아있지 않은 걸 확인했지만, 발걸음을 돌리지는 않았다.


그러고 나서 아직 세상은 팍팍하지 않다며 가방을 찾았다고 동네방네 떠들어 댔다. 여기서 나의 문제적 습관. 이 일련의 사건을 친구들에게 전할 때 나는 일부러 가방 속의 지폐가 깡그리 없어졌더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지폐로 술값을 낸 게 아니냐는 의혹이 있을 수 있지만 그날 술값은 친구가 계산했으므로 무효). 술을 그렇게 마시고 몇 만 원씩이나 잃어버렸다고 하면 날아 올 ‘그러게 술 좀 작작 마셔'라는 핀잔을 피하고 싶었음과 동시에, 이 이야기가 흠결 없는 해피엔딩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예를 들었지만, 이와 같은 누락을 나는 몇 번이나 셀 수 없이 단행해 왔다. 특히 말을 꺼내기 어려운 사적인 일일수록, 비극적인 일일수록 누락의 범위를 키웠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편집과 왜곡은 하게 마련이라지만 나의 경험을 안전한 이야기로 완성하고 싶다는, 그리고 타인에게 비치는 나를 온건한 이미지로 보호하고 싶다는 강박으로 점점 숨기는 정보가 많아지자 다른 한편으로 나라는 사람은 계속 진실함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날 가방은 찾았지만 돈은 도둑맞았고, 그 술집 사장은 가방을 돌려줄 만큼은 친절하지만 현금까지 돌려줄 인품은 아니었으며, 그날의 나는 흥청망청 술에 취해 현금이 든 가방을 흘리고 다닐 만큼 허술했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해도 됐는데.


세상살이는 동화처럼 순수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의 무결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동화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행복한 시점에 이야기를 맺으면 그만이지만, 삶은 언제나 삽시간의 행복과 기나긴 고난의 연속이다. 동화 속 세상은 뚜렷한 권선징악의 질서로 지배되지만, 현실은 훨씬 더 복잡다단한 힘의 논리로 지배된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삶을 동화처럼 살고 싶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모조리 흑과 백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전부 선과 악으로 나뉜다면 그만큼 지루한 게 또 있겠나 싶다. 영화나 드라마만 보더라도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 없잖은가.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얼마 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를 보고 집에 돌아와 감독의 인터뷰 영상을 찾아봤다. “알쓸별잡”이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전체적으로 인상 깊었지만 그중 몇몇 질문에 대한 놀런 감독의 답변이 기억에 남아 적어 둔다. 먼저 신채경 천문학자의 ‘(영화를 만들 때) 인간의 모호함과 복잡함에 주목하는 이유’에 관한 질문에 감독은 이렇게 답한다.

“보통 영화를 보면 인물을 단순화하는 경향성이 있는데, 저는 늘 그 범주를 벗어나는 캐릭터와 영화를 좋아했어요. (중략) 그리고 저는 주인공이 결점을 가진, 그래서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실존인물이자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오펜하이머 역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를 이끄는 천재적인 물리학자인 동시에 핵폭탄 개발을 성공한 시점에도 끝내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는 등의 위태로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그 복합적인 인물의 내면을 구현해 낸 장면들은, 캐릭터를 향한 놀런 감독의 그러한 의도를 십분 담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구조를 먼저 생각하는지, 아니면 이야기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구조화하는지’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영화를 구상할 때 항상 구조를 생각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도 함께 생각합니다. 구조와 이야기를 분리해서 보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구조를 정하기 전에는 이야기를 쓰지 않습니다.”

그동안 놀런 감독 특유의 구조화 방식, 시공간을 교차하거나 때로 역행하기도 하는 독특한 배치로 이루어진 영화들을 재미있게 봐 왔던 터라 ‘구조가 곧 이야기’라는 말은 나에게도 깊이 와닿았다. 감독이 정한 플롯을 따라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그러지 못하기도 하는 관객으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명제인데, 영화를 만드는 시점에서는 구성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같은 소재로도 전혀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다는 뜻일 테니 새삼 흥미로웠다.


시답잖은 내 일화를 타인에게 전할 때 일부러 건전한 이야기로 단순화했다는 회고로 출발한 글에, 어쩌다 보니 세계적인 영화감독을 소환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감독도 아니요 내 삶이 영화도 아니지만, 불현듯 내 이야기가 왜 그리 상투적 해피엔딩으로 들려지길 바랐는지 질문하게 된다.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 모순적이면 모순적인 대로, 결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진실에 가까운 쪽이 더 풍성하다는 사실을 알면서 말이다.


또한 뜻대로 구성하고 해석하며 살아도 되는 내 삶인데, 세상이 끌고 가는 대로 수동적인 적응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등골이 사늘해진다. 다시 한번 드는 생각이지만, 영화나 드라마만 보더라도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을 리는 없는데.



Se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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