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원이 되고 싶어>에서 만난 문장
처음 이사 온 초등학교 3학년 때만 해도 잠시 머물다 갈 집이라고 생각해 별다른 물건을 들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육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이렇게 갑자기 눈이 떠지는 밤이면 이 방에, 이 삶에 영영 갇혀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면 천장이, 하늘이, 온 세상이 통째로 날 짓누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천장과 나의 세계. 점점 더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시작했다.
박상영, <1차원이 되고 싶어> 91쪽
폴란드 바르샤바에 처음 이사 갔던 그 겨울날이 생각난다. 아직 '내 집'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낯선 공간. 가구도 들어오지 않아 휑했던 방. 서울 아파트에 비해 너무 높았던 천장. 북구의 날씨와 겨울 안개가 만든 축축하고 습한 공기. 그런 낯선 장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문득 새벽녘에 눈을 뜨면, 내 삶이 이대로 영영 갇혀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바르샤바의 겨울밤은 길고도 어두웠다. 서울의 시간에 맞춰 눈을 떴지만 바르샤바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나는 차가운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한국인이지만 폴란드로 삶의 거처를 옮긴 나.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으로서 살 수 없었던,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남편은 해외 법인의 직원으로서 일하고 체류할 수 있는 워킹 퍼밋, 즉 사회적 일원으로서의 법적 신분을 갖췄지만, 나는 '워킹 퍼밋을 가진 자의 배우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남편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 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삶이란 얼마나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인 삶인지. 그 속에서 때때로 나는 일상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공기처럼 부유했다.
나름대로 나의 세계를 넓히려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애썼다. 새로운 세계와 낯선 일상 속에서 글감을 찾아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내 이름으로 글을 발행했고, 한글학교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이 도시에 체류하는 의미를 탐색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나를 '자유기고가'라고 불러 주었는데 그 단어가 참 아이러니하다고 느꼈다. 나는 '자유'기고가였지만 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폴란드라는 나라 안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자유는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니까. 언어도, 신분도, 그리고 삶의 조건도.
그러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문이 활짝 열린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나는 경력 단절 여성이고, 세 명의 미성년자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이며, 가사와 양육에 묶여 있는 전업주부였다. 바뀐 것은 공간뿐, 일상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곳은 나의 나라.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틈 속에서, 적어도 한쪽 창문쯤은 열어볼 수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무런 체류 자격이나 워킹 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민이고, 일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 다시 사회로 나갈 수 있으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막내는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고, 아이들은 엄마 없이 스물네 시간을 꾸려 나갈 수 있는 독립적인 능력이 없으며,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은 여전히 나의 몫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무력감을 느꼈던 시간,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열 수 있는 문이 없었던 폴란드에 비하자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여섯 해 전 던졌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본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