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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나의 첫 번째 독자가 되기까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에서 만난 문장

by 주정현


믿었던 엄마가 어느 순간 결연한 표정으로 육아기를 쓰겠다고 나서니 아이들은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어머니는 육아기를 쓸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고 믿는 사실을 쓸 게 뻔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얘들이 날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봤다는 말 아냐, 이거.

(...) "우리가 얘기하는 의미는 사기꾼, 거짓말쟁이라는 뜻이 아니고 과장법을 말한 거예요. 완전히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게 아니라, 있었던 일이긴 한데 그걸 어머니 나름대로 확대 해석하신다는 거죠."

박혜란 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26쪽


딸이 자라 중학생이 되고 나니 생각지도 못한 기쁨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바로 내 글을 읽어주는 첫 번째 독자가 생겼다는 것. 나는 아이를 키우며 느낀 마음, 양육에 대한 고민, 특히나 자녀 교육이나 학교 교육에 관련된 이야기를 브런치에 많이 쓰는데 그러다 보니 내가 쓰는 글의 절반 이상은 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늘 글을 쓰는 마음 한구석엔 글감이 되는 아이들에 대한 부담이 있다.


'이 글을 아이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너무 과장되거나 사실과 다르다고 느끼진 않을까?'




글을 쓰는 일은 사실 '기승전결'을 만드는 일이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일상의 조각들을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편집과 양념이 더해진다. 감정의 결은 조금은 드라마틱하게 보여줘야 글이 살아나고, 때때로 어쩔 수 없이 몇몇 장면은 미화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박혜란 작가님의 책,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가수 이적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진 박혜란 작가님이 처음 육아서를 쓰기로 계약했을 때, 세 아이들은 "어머니가 언제 우리를 키웠다고 육아기를 쓰느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컸다."라든지, "어머니가 육아서를 쓰면 자신이 잘했던 사실만 기억해서 과장해서 쓸 게 뻔하다"라고 말하며 반발했다고 한다. 처음 이 에피소드를 읽었을 때는 그냥 웃고 넘어갔지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뒤로는 이 이야기가 자꾸 마음에 맴돈다.


똑같은 사건도 아이의 시선과 부모의 시선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석하고, 전혀 다른 기억으로 머릿속에 저장한다. 같은 말을 했다고 생각해도, 같은 사건을 경험했다고 생각해도, 내가 떠올리는 장면과 아이가 떠올리는 장면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종종 나는 내 글을 평가해 줄 '최종 심사위원'을 찾는다. 바로 중학교 2학년 큰 딸. 브런치에 글을 업로드하기 전이나, 또는 방금 게시한 글이라도 가급적 근시일 내에 딸에게 "엄마가 최근에 글을 한 편 썼는데..." 하며 브런치 계정을 보여준다. 딸에게 부끄럽게 느껴질 만한 과장이나, 아이들의 개인적 치부가 불필요하게 드러나는 문장이 있는지, 혹은 딸의 입장에서 "엄마, 이건 너무 뻥이 심한데?"라고 느껴질 만한 부분이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해 보기 위해서다.


사실 처음엔 조금 두려웠다. 나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내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어떤 피드백보다 날카롭고 벌거벗은 느낌이 들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가 그러기나 말기나, 어차피 딸이 스스로 내 브런치 글을 찾아 읽는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그 이후로 알아서 자진납세(?)하는 중이다. (딸아이 학교 노트북에서 최근 방문 페이지 기록에 내 브런치 게시글이 빼곡하게 뜬 것을 발견했을 때의 오싹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의외로 딸은 내 글을 읽는 걸 무척 좋아한다. 아이는 내 글을 읽으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서로 다르다는 걸 발견한다. 엄마는 이런 일이 이렇게 보였구나. 엄마는 이런 포인트에서 감정이 생기는구나. 나는 딸의 반응을 보며 이 아이가 어느새 글을 통해 나를 읽어낼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데에 새삼 놀란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매개로 서로의 마음을 설명하고 다시 이해하는 순간들이 요즘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하다.


딸과 함께 내가 쓴 글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은 무척 즐겁다. 글 속의 어떤 장면 하나를 두고 서로 다른 기억을 꺼내며, 내가 왜 이런 문장을 선택했는지 설명하고, 어쩌면 그 순간 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던 대화를 뒤늦게나마 나누게 된다. 예전에는 딸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나의 내면의 생각을 전부 들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어느새 열다섯 살이 되고, 어른의 세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서, 이제는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동료 같은 사이가 되었다.


사실 나는 늘 나만의 첫 번째 독자를 갖고 싶었다. 예전에 어느 소설가가 원고를 완성하면 가장 먼저 배우자에게 보여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수정 전의 거친 원고까지도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처음으로 보여주고 가감 없는 피드백을 받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남몰래 부러워했었다. 아쉽게도 회사 업무로 늘 바쁘고, 감성과 서사보다는 실용성과 논리를 중요시하는 성격의 배우자는 그런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을 읽고 마음을 나누는 첫 독자의 자리는 늘 빈자리였다. 그런데 어느새 내 키만큼 자라 버린 내 딸이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채워주고 있다. 풋풋하고 여리고, 때론 솔직하고 단단한 10대의 감성으로.


내 글을 누구보다 먼저 읽어주는 사람이 ‘내 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절반은 위로받고, 절반은 용기를 얻는다. 글쓰기는 결국 마음과 마음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는 일이니까. 앞으로도 우리는 같은 페이지 위에서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찡그리며 자라나겠지. 글을 읽고 쓰는 일은 결국 서로를 더 잘 알기 위한 과정이니까.

“엄마, 이 문장이 진짜 좋았어.”

“엄마, 근데 이 부분은 조금 오글거려.”

그런 말들을 스스럼없이 주고받으며, 우리는 아마 앞으로도 오래도록 서로의 문장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이런 대화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글 너머의 삶에서도 서로를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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