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진실-'편식'
살아있는 한 우린 먹어야 한다. 적게 먹을 순 있어도 아예 먹지 않고 살 수 없다. 먹는다는 것은 존재의 기본 욕구지만, 아이가 낯선 식재료를 입 안에서 오물거려 삼키기까지의 경험은 모험이나 낯선 친구를 사귀는 과정과 무척 닮았다.
어린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밥과 반찬을 얹은 숟가락을 '슝~' 허공에 올려 아이 입속으로 '쏙!' 넣어주자, 다람쥐처럼 양 볼 가득 밥을 담은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즐거워하는 식사라면 평소에 제 아무리 편식 대장이라도 밥 먹이기는 성공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양육자가 아이에게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마음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며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 애썼다.
사정이 이런 만큼 '잘 먹지 않는 아이'를 둔 양육자의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다. 간혹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나머지 참았던 감정이 폭발해 버리기도 하지만, 식습관을 배워야 할 아이에게 이런 갈등은 오히려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으니 피할 일이었다.
우린 스스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일찍 공포를 경험했을지 모른다. 예민하고 보드라운 입안으로 낯선 음식이 처음 들어와 혀로 오미(五味)를 경험한 순간은 기쁨보다 두려움에 더 가까운 경험이 아니었을까. 편식이 심한 아이가 낯선 음식과 친해지길 기다리며 응원하는 일과 그것은 당연히 두려운 거라고 용기를 북돋는 말은 아이가 순순히 마음을 열게 할 만큼 사려 깊은 것이면 좋겠다.
오랫동안 글쓰기 교실을 통해 많은 어린이를 만나다 보니 평소 행동만으로 아이 식습관을 예측할 '공식'이 있는 걸 알게 됐다. 그것은 '낯가림과 편식'의 예사롭지 않은 연관성이었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는 편식했고, 편식하는 아이는 대부분 낯가림이나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알레르기등의 문제는 예외다) 그 외에 양육자의 편식 습관이 아이에게로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예비 초등학생인 일곱 살 연우도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내 교실에 처음 와서 친해지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선생인 나를 가장 당황케 한 것은 연우가 '어떤 간식도 거부하는 어린이'라는 점이었다. (어린이가 간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선생 입장에선 마음 얻을 다른 방법을 빨리 찾아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다. )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기다 보니 연우 엄마는 걱정이 많았다. 과거 '웅변학원'처럼 자신감을 키워줄 방법을 내게 물어왔었다. 하지만 현재 소심하고 낯가림 심한 일곱 살 아이가 아무런 동기 없이 갑자기 목소리 높여 자기주장을 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때 나는 더 늦기 전에 연우의 '편식 습관 고치기'에 더 집중하길 권했었다.
이미 식재료에 대한 호불호가 나뉜 일곱 살이라 쉽진 않겠지만, 초등학교 입학 전에 편식 습관을 교정하는 것은 여러 의미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아니, 더 미룰 일이 아니었다. 편식 습관을 해결하지 못한 채 입학한다면 결국 가장 어려움을 겪는 것은 연우였다. 어쩌면 예비 초등학생의 필수 준비 사항에서 편식 습관 교정이 한글을 떼고 입학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 일수 있었다.
학교에서 글짓기 강의를 할 때 아침을 안 먹고 등교하는 아이가 적지 않은 것을 알게 됐다. 바쁜 아침밥을 못 먹여 보내는 양육자 입장에선 학교에 가면 곧 급식을 먹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편식이 심하고 식습관 완성이 되지 않은 저학년에겐 다른 문제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에 따라 잔반 검사까지 하며 한입이라도 더 먹이려 애쓰기도 하지만 아이가 급식 시간이 다 지나도록 먹을 수 없다며 버티면 선생님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아이는 아침과 점심까지 먹은 게 거의 없는 상태로 방과 후 수업에 오기도 했다. 아이들은 "엄마!"를 부르듯 달려와 내게 안기며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선생님, 배가 너무 고파요."
그때는 아이들에게 글쓰기 말고 차라리 밥을 차려주고 싶은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