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는 무얼 먹었을까?
종일 배고프던 아이들이 교문을 벗어나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학교 정문 가까이 있던 편의점이었다. 내가 교실 뒷정리를 마치고 그 앞을 지날 때 편의점 풍경은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아는 배고픈 아이는 거기 다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만세를 하듯 두 팔을 위로 추켜들고 있었는데 한 손엔 먹거리를 다른 한 손엔 지폐 한 장을 펼쳐 들었거나 카드를 흔들었다. 계산대를 중심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늘어선 아이들은 빨리 계산해 주기를 애원하며 여기저기서 "이거요!"를 외쳤다. 계산을 마쳐야 무엇이든 입속으로 넣을 수 있는 아이들 표정은 간절했다.
드디어 계산을 끝낸 아이는 편의점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아이가 다급히 입에 넣는 것은 밥도 빵도 아닌 대부분 음료수, 젤리, 아이스크림, 튀긴 꼬치류였다. 아침을 못 먹었고 편식등의 이유로 종일 굶다시피 했거나 먹은 양이 턱없이 부족했던 아이들도 달거나 짠 것으로 급히 허기를 채우고 다시 학원차에 올랐다. 맞벌이 가정의 아이는 양육자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많게는 세 군데 이상 학원차를 바꿔 타기도 했다. 매번 높은 교육열 1번지로 거론되는 대도시의 예를 들 필요도 없었다. 대한민국에선 지방도시에 사는 초등학생의 삶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저학년은 모든 면에 개인차가 많은 시기였다. 뭐든 잘 먹는 아이도 있지만, 뱃구레가 원래 작거나 비위가 약해서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하는 등 사정이 모두 달랐다. 한참 식습관 형성이 될 시기였지만, 어쩔 수 없는 형편에 소중한 끼니를 양보하고 길거리 간식으로 허기를 달래는 현실은 유독 걱정되는 대목이었다.
이제 세상은 아무리 붙잡아도 저대로 변하겠지만 초등학생이나 청소년, 청년 할 것 없이 어떤 상황에도 배를 주리지 않을 정도의 돌봄과 존중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허기'라는 단어는 실제 배고픔과 정서적 굶주림 모두에 사용한다. 정서적 허기를 실제 배고픔으로 착각해 폭식하는 경우처럼 어린 시절의 배고픔이 마음의 결핍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얼마 전 아이가 가벼운 비염 증상으로 약을 먹고 내 침대에서 낮잠이 들었고, 아이가 자는 동안 나는 밑반찬을 만들었다. 청소년이 둘이나 있는 우리 집에선 냉장고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다. 한참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기도 했지만, 운동을 하며 체중증량을 하는 아들 때문에도 언제든 바로 꺼내 쓸 수 있도록 재료 준비는 꼭 필요했다.
미리 장을 봐둔 야채, 버섯등 식재료를 손질해 냉동실과 냉장고에 소분해 넣고 고기도 양념해 재웠다. 장조림과 얇게 슬라이스 한 연근조림을 만들어 냉장고를 채웠다. 부엌일이 끝날 즈음 잠에서 깬 아이는 달게 잘 잔 얼굴로 나오며 말했다.
"엄마, 나 너무 꿀잠을 잤어, 잠에서 깰 때 주방에서 요리하는 소리랑 맛있는 냄새나는 거 막 힐링돼! “
아직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는 소리와 냄새만으로 행복함을 느꼈다는 거였다.
먹이려는 이의 마음과 먹는 마음 사이에는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 외에
무언(無言)의 소통 창구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미 바뀐 세상을 안 바뀌었다 말할 수 없다. 시절에 맞게 생활 방식이 바뀌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제 아이들은 모든 재료를 담은 ‘한 그릇 ’ 밥을 앞에 두고 핸드폰이나 티브이를 보며 혼자 먹는 일상에 익숙해졌다. 식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기보단 모두 한데 섞어 비비거나 볶아서 소스를 얹어 먹었다.
앞선 글에서 나는 '낯선 식재료'를 '친구 사귀기'와 비교한 바 있다. 각기 다른 타인의 고유성을 인정하고 낯가림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타인은 물론 본인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면 지금의 변화가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각한 순간부터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
효율에 맞춰 과정이 축소된 일상을 살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 해도 전하는 마음과 소통은 더욱 세심하게 이뤄져야겠다. 사라져 가는 '집밥'에 상응하는 소통 방식 말이다. 아이들은 항상 부모를 먼저 용서하고 언제나 기다렸다. 그런 아이들이 제대로 된 끼니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은 눈을 보며 자세히 설명해 주고 오늘은 무얼 먹었는지 다정히 물어봐 주는 그 목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