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이는 어떻게 먹었을까?
우리는 태어나서 대략 20년 정도를 '주는 대로' 먹었다. 어떤 이는 평생을 주는 대로 먹었고 그를 평생 먹인 이는 '나도 누가 주는 대로 좀 먹어 보고 싶다' 말했다.
아이들은 집에선 양육자가 주는 대로 먹고 학교 급식 역시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학교 급식의 주체는 분명 학생이었지만 완벽히 운영자에 맞춰진 환경이다. 자율 배식을 할 경우 양을 맞추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고, 먹는 행위에 담긴 개인적 취향이나 종교적 신념까진 차치하더라도 맵거나 달거나 짠 정도의 개인차도 존중받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불과 2년 전인 2021년에야 전국 초, 중, 고에 무상급식을 지원하게 됐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가구의 아이가 최소한 눈칫밥은 먹지 않도록 한 수준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개인 취향까지 요구하기엔 갈 길이 먼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끼니마다 내 입으로 들어갈 먹거리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과 매 끼니를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삶은 전혀 다르다. 게다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위해 음식을 장만해 먹이기까지 한 사람이라면 그 삶의 질이나 경험에 의한 유창성과 마음 상태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껏 대부분 여자에겐 결혼과 동시에 누군가를 먹이는 삶이 시작됐지만 남자는 달랐다. 먹여주는 대상이 엄마에서 아내로 바뀔 뿐 주는 대로 먹는 상황은 잘 바뀌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지난 앞 세대엔 자신이 먹을 한 끼조차 스스로 차려 먹지 못하거나 요리는 ‘여자의 일’ 이란 인식을 끝까지 고수하며 한 존재로써 더욱 성장할 기회를 놓친 남자가 많았다. 반면 요즘은 남자도 육아 참여를 당연한 공동의 과제로 여기며 요리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발견할 수 있어 반갑다. 맞벌이라는 시대적 변화의 영향인걸 알면서도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귀하게 여겨졌다.
내 글짓기 시간에는 '집안일'의 종류 알아보는 수업을 꼭 진행한다. 아이들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집안일을 몰랐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 '설거지'는 알지만 그러기 위해 누군가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요리를 해야 먹을 수 있는 과정을 설명하면 "그것도 다 집안일이에요?" 하며 놀랐다. 공동체 안에서 아이 자신의 위치가 분명하고 그것을 스스로 아는 것은 아이의 자존감과 깊은 연관이 있었지만, 가족 공동체 안에서 아이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며칠 전 수업에서 3학년 현수는 '집안일 마인드 맵'을 앞에 두고 한참 애를 먹었다. 외동인 현수는 열 살이 되도록 집안일을 함께 해야 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거나 '너는 공부만 해!'란 말을 주로 들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집안일'을 적어 보세요> 란 질문에 현수는 <공부하기, 숙제하기 >를 적었고 난 그것이 왜 집안일이 될 수 없는지 오랫동안 설명해야 했다.
유아기 아이도 말을 배우고 인지 발달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먹을 것을 선택하게 할 수 있다. 목이 마른 아이에게 물과, 우유 중에 선택하게 하거나 하얀색 우유와 노란색 주스를 보여주며 고르게 할 수 있다. 밥을 먹일 때도 메뉴의 선택지를 두 개 이상 두고 그중에 무엇을 먹을지 고르게 하면 편식하는 아이도 양육자가 주는 대로 먹을 때 보다 책임감을 갖고 즐겁게 먹는다.
우리는 아이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선택을 하게 해야 한다.
평소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의사를 존중받는 경험을 한 아이는 달라졌다. 진정한 교육은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일상에서 조금씩 스며 '사람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린 내 아이가 소중할수록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을 키워 타인에게 절대 피해 주지 않는 것을 가르쳐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존중받은 경험이 쌓인 아이는 타인도 존중하기 때문에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레 익힌다. 이 모든 과정을 지속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곳은 학교도 학원도 아닌, 오직 '가정'이고 이것을 할 수 있는 것도 주 양육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