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브라질에서 두 달 살아보기
여행자에게 가장 큰 난관은 아마도 언어, 날씨, 관습일 것이다. 여행의 매력은 낯선 자가 된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한없이 외로워지고 그만큼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 감각이 예민해진다. 여기 브라질은 포루투칼어를 쓰지만, 정확히는 브라질 현지화된 포루투칼어다. (하긴 한국어도 남한과 북한의 언어가 점점 빠르게 달라졌고, 제주도에서도 또 다르니 남한의 대략 80배쯤 된다는 브라질에서 언어가 변화의 과정을 가지는 건 당연하다. 언어는 대학시절 나의 전공이었던 언어학과의 모토처럼 하나의 생물임에 틀림없다.)
여기 브라질에서 영어는 아무래도 교육수준이 높은 경우만 가능한 것 같다. 여기 오려면 포루투칼어는 필수다. 내가 외국인은 영어는 기본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만큼 언어의 쓰임새도, 사고체계도 다르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번역앱을 써야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듯이, 브라질은 브라지리아가 맞다. 즉 각자의 정체성은 각자의 언어에 따라 다르다. (생각은 언어를 기본으로 하니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니까 여기는 브라질도, 브라실도 아닌 브라지리아인 셈이다.
그런 면에서 스팅의 노래 <Englishman in New York>은 신기하다. 뭐 그리 큰 언어장벽도 없을텐데 스스로를 에일리언(외계인), 그것도 합법적인 에일리언이라고 자신을 정의한다. 즉, 낯선 자가 된다는 건은 결국 여러 요소를 가지는 거 같다. 단지 언어 만의 문제는 또 아닌 것이다. 뭐랄까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방인의 고독이다. 여기서도 느끼는데 뭔가 가치의 우선순위가 한국과는 다름을 자주 접한다. (노래 가사대로 이 갈등의 해법은 '그들이 뭐라고하던 당신답게 사는' 것이다.)
낯설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고상한 특권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