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Woman in Red
12. 건물 뒤편, 실외, 낮
영수(남, 30대)가 캐주얼 차림으로 재떨이용 쓰레기통 옆에 혼자 쪼그려 앉아있다.
자세히 보면 영수는 담배가 아닌 막대사탕을 물고 있다.
자막 “멤버3. 영수”
잠시 뒤, 영수가 민준에게 다가온다.
민준:
사내자식이 막대 사탕은 또 뭐냐? (담배를 꺼낸다)
영수:
(정면을 바라본 채) 담배 좀 끊어보려고.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
민준:
(담배맛 떨어져서 담배를 집어놓고)
하긴 우리가 예전같진 않지. 그동안 잘 지냈냐?
영수:
그냥 그렇지 뭐. 근데 몇 명 안 온 거 같더라?.
민준:
다들 사는 게 바쁘니 그렇지 뭐.
영수:
진규형은?
민준:
현철이 말로는 학원이 요즘 시험기간이라 바쁘대.
그 동네가 입시 경쟁으로 유명하잖냐.
영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옛날에 사고 친 거 막아준 게 누군데.
민준:
그러게. 암튼 현철이 편으로 축의금은 보내셨대.
경사는 못 가도 나중에 애사는 빠지자 말자고
일장연설을 하셨댄다.
영수:
그 형은 말 참 이상하게 해.
민준:
그 형 특기가 그거니까. 괜히 사고 쳤겠냐?
영수:
(그제야 민준을 바라보며)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친구 아버지 장례식에 가서
진짜로 슬퍼한 적이 몇 번이나 되냐?
남의 불행이나 확인하고는 그래 나는 아니구나,
다행이다 하는 주제에.
민준:
야, 그건 말이 좀 그렇다.
영수:
좋은 일 있으면 찾아가서 박수 쳐주고
같이 기뻐하는 게 진짜 친구고 선배지.
뭐 그렇게 일이 중요하다고 경사니 애사니
핑계나 대고. 살아있을 때 잘 해야지,
죽어서 질질 짜봤자 다 소용없어.
민준:
야, 역시 우리 박사님 명쾌하시네.
영수:
석사야. 박사 논문 아직 통과 안 됐어.
민준이 피식 웃는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
이때 현철이 급히 다가온다.
현철:
야, 야, 야! 대박, 대박!
민준:
뭔데?
현철:
연예인 떴어. 연예인!
민준:
(눈이 번쩍) 오, 누구?
현철:
무슨 주말 예능 프로에 나오는 앤데,
얼굴도 예쁜데 몸매가 아주 그냥, (사이) 끝내줍니다.
와, 연예인은 진짜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근데 그 이름이 뭐더라? 키 큰 여잔데…
민준:
혹시 드라마에도 나오고 눈도 좀 크고,
레전드 빨간 원피스?
현철:
맞아! 맞아! (신나서) 신부 친구란다!
만세다, 만세! (춤추듯 몸을 흔든다)
민준:
그래, 이래서 영수 말대로 경사는 꼭 와야 된다니까!
영수:
하여간 누가 수컷 아니랄까봐, 밝히기는.
순간 화면이 3분할. 민준, 현철, 영수의 얼굴.
넥타이를 매만지는 민준, 춤추는 현철,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영수의 못마땅한 얼굴.
프리즈 프레임.
민준:
(N) 우리 세 사람은 같은 중·고등학교 동창이다.
나와 현철은 대학까지 같아서 둘 다 사범대를 갔고,
현철은 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교생실습 후 내 적성이 가르치는 일이 절대 아니란 걸
깨닫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수는 우리 셋 중에서, 아니 전교생을 통틀어
공부를 제일 잘 해서 서울에서 가장 잘 나가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지금도 녀석은 학교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고 친구였다.
세 사람의 얼굴 위로 타이틀이 뜬다.
타이틀 “결혼식의 멤버”
13. 화장실, 실내, 낮
축가 공연을 하는지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화장실 소변기 앞에서 나란히 각자 볼일을 보는 세 사람.
민준, 현철, 영수 순이다.
현철:
근데 우리 부조 합쳐서 같이 할 거냐?
따로 신랑 주는 게 낫겠지?
영수:
어? 아까 맡긴 건?
현철:
일단 물어보고 내려고.
민준:
근데 넌 국어 선생이 무식하게 부조가 뭐냐?
축의금이지. 상갓집도 아닌데.
현철:
어? 그런가? 내가 그렇지 뭐.
(사이) 어떡해? 합쳐, 말아?
민준:
너 알아서 해.
세 사람이 손을 씻으려 줄을 선다.
맨 앞에 민준, 영수, 현철 순서다.
민준이 손을 씻기 시작한다.
영수: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근데, 무식은
민준이 니가 무식이거든.
국어사전 뒤져봐. 부조는 둘 다 쓰는 거야.
뭘 알려면 제대로 알던가.
민준:
(빈정이 상해서 손 씻다 말고) 하여간
아는 척하는 거 하나는 진짜 알아줘야 돼.
여기서 사전을 왜 따져? 상식을 따져야지.
이래서 먹물은 현실을 몰라요.
그렇게 꼭 사람을 가리켜야 속이 풀리냐?
영수:
가르쳐야. 가르켜가 아니고. 가르쳐.
민준:
(속이 부글부글) 알겠습니다, 박사님.
(신경질적으로 물비누를 팍 누른다)
현철:
그럼 민준이랑 나는 봉투 합친다.
(지갑에서 3만원을 꺼내 봉투에 넣는다)
민준:
(거울로 현철의 행동을 보고는)
야, 너는 또 3만원이 뭐냐?
현철:
나 결혼할 때 3만원 했길래.
민준:
(손 씻기를 마친다) 그럼 뭐 이해는 간다.
하여간 저 신랑 놈이 문제네. 속도위반에 짠돌이에.
영수:
(손을 씻기 시작하려다가) 야, 니들 그러는 거 아니다.
민준:
뭘 또?
영수:
(손을 씻으며) 결혼식 끝나고 누가 얼마 냈는지 확인하고
그러는 거 사람이 할 일이 아니야.
그거 친구 이마에 넌 3만 원짜리, 넌 5만원, 10만 원짜리
이렇게 딱지 붙이는 거라고.
사람을 무슨 한우마냥 A+, A++,
그렇게 등급 매기는 거라고 그게.
(일부러 민준 쪽으로 손의 물기를 턴다)
민준:
(영수의 말에 잔뜩 열 받은 얼굴이다)
14. 예식장 앞, 실내, 낮
예식장으로 걸어가는 세 사람. 앞서가는 영수에게 민준이 들으라는 듯이 말한다.
민준:
역시 박사님은 수준 높으시네. 아, 석사님이시지?
그래 석사님은 부조를 얼마나 하셨을라나?
돈 대신 우정의 편지라도 써서 봉투에 담으셨나?
옷은 또 오늘따라 왜 양복도 아니고 캐주얼이실까?
자유로운 영혼은 뭐가 좀 다른가봐.
영수:
(걸음을 멈추고) 아, 이래서 노답인 애들은 뭔 말을 해줘도
알아듣질 못한다니까. 너는 내 말 귓등으로 듣지?
세상 정해진 대로 안 사는 인간들 보면
아주 아니꼽다 이거지?
민준:
(비꼰다) 아, 그렇게 잘 나셔서
이혼을 하시고 결혼식에 오셔?
민준의 커진 목소리에 놀라 주위 사람들이
세 사람 쪽을 쳐다본다.
순간 침묵이 흐른다. 민준과 영수가 서로를 노려본다.
둘 사이에 현철이 끼어든다.
현철: 오늘 좋은 날인데, 진짜 왜 이러냐?
민준과 영수는 당장이라도 싸울 기세다.
현철이 험악한 분위기에 난처한 얼굴이다가
돌연 봉투에서 3만원을 꺼내서 지갑에 도로 집어넣는다.
민준과 영수가 갑작스런 현철의 행동에 의아해한다.
현철:
야야야, 니들 화 풀어.
(지갑에서 5만원 한 장을 꺼내 봉투에 넣으면서)
물가 상승률 고려해서 이 정도 넣으면 됐지? 오케이?
야, 오늘 동창 결혼식이다, 싸우는 날이 아니고.
영수와 민준의 분위기가 수그러든다. 하지만 서로 외면한다.
현철이 민망해서 주위를 살피다가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된다.
현철:
(작은 목소리지만 흥분해서) 야, 떴다!
세 시 방향, 빨간 원피스!
민준과 영수의 시선이 현철이 말한 방향으로 향한다.
세 사람이 바라보는 여자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세 남자의 시선.
군무처럼 제대로 합이 잘 맞는다.
현철: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오우야…
넋이 나간 채로 한 곳을 바라보는 세 남자의 얼굴.
(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