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된 무력감
그때였다. 한 남자가 형석이 진찰 중인 곳으로 들이닥쳤다.
“나가! 들어오지 마! 꺼지라고.”
남자를 보자마자 여자는 소리를 질렀다. 누가 봐도 그 남자는 그 여자의 연인이며, 이 폭행의 흔적을 남긴 가해자임에 틀림없었다.
“제발 내 이야기를 들어줘. 그건 다 오해야”
“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내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했어.”
“그래. 미안해. 하지만 말이야.”
남자는 준비해 둔 변명을 꺼내 놓으려고 했지만, 여자는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모든 비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듯 이야기하다니! 넌 진짜 인간으로서 완전 쓰레기야. 심지어 나랑 잔 이야기까지, 그 자세한 이야기까지 말이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미안해. 진짜 미안해.”
형석은 더 이상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기가 거북했다.
“검진을 더 진행해야 하니 나중에 오시죠.”
“안 됩니다. 저는 오해를 풀어야 해요.”
남자는 완강하게 버텼다.
“자꾸 이러시면 경비요원을 부르겠습니다.”
그러자 남자는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혹시 저 남자가 그런 건가요?”
형석은 고만 끝에 물어보았지만, 여자는 대답을 망설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형석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사실대로 말씀해 주셔서 합니다.”
폭행을 인지하면 일단 경찰에 알려야 할 의무가 의사에겐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이렇게 부정을 한다면 도리어 일은 최악의 상황으로 꼬여버린다.
헤어질 기회가 도리어 두 남녀를 한 팀으로 묶어버리는 경우로 바뀌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랑의 방정식은 이렇게 복잡하다. 사람들은 의외로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학습된 무력감’으로 안 좋은 선택을 한다. 이별의 충격을 피하기 위해 폭력의 늪으로 다시 스스로 몸을 담그고 마는 것이다. 형석은 그냥 남몰래 한숨을 쉬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