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통
형석은 다시 응급실로 돌아가려다 잠시 탈의실에 들렸다.
형석은 손목시계를 풀었다. 러시아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도 이미 두 달이 지났는데, 왜 이렇게 멋을 부린 날에 아무 생각없이 이 시계를 골랐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습관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인지 이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마르가리타.
“목이 너무 아파요. 죽을 거 같아요. 항생제 처방이 필요해요.”
안나는 밤중에 몸살이 심해서 병원을 찾아왔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안나는 몹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안나는 러시아에서 의사였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한 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의사라면 금전적인 문제는 걱정하지 않을 거 같지만, 러시아에서 의사는 명예직에 가까웠고 봉급도 너무 적었다.
제2 외국어로 러시아어를 배웠던 형석은 서툰 러시아어로 안나를 안심시켰다. 이런 저런 농담도 하면서 가까워졌고, 그녀의 진료비도 형석이 대신 납부를 하기도 했다.
안나는 파란 눈에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가진 전형적인 서양 미인이었다. 그런 여자와 별다방에서 형석은 영어와 러시아어를 섞어가며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었다. 별다방의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신기해하며 구경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안나는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가진 여자였다.
“러시아하면 위스키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거지?”
아니었다. 그녀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뭐라고? 러시아 사람이면 톨스토이를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형석의 말에 안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편견이에요. 난 그냥 오타쿠라고요.”
정말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슬램덩크를 좋아하고, 귀멸의 칼날을 자주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떠나는 날에 형석은 안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하지만 언제나 장거리 연애는 대개 끝이 정해져 있었다.
사랑은 국경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나 드물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하긴 일반적인 사랑도 이뤄지기가 쉽지 않은데, 언어와 문화라는 장벽이 가진 그 거대한 벽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형석이 모스크바에 갔을 때,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한 상태였다.
그녀가 이별의 선물로 준 것이 그 시계였다. 왜 안나가 시계를 선물해주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한껏 멋을 부린 날에 형석은 이 시계를 골랐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왜 자신이 이 따위 바보 같은 짓을 한 것인지 도무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형석은 손목시계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며 하나의 사실을 더 깨달았다.
'난 어쩌면 선배 은경을 좋아하고 있는 지도 몰라.'
- 2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