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김수영 - 비틀비틀
평생을 물밑에서 사는 존재들이 있다. 준비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이들. 중한은 준비만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라 생각했다. 중한의 꿈도 유일했다. 스무 살을 막 넘은 그에게 가장 최선의 방도는 출국이었다. 중한의 친구들은 그의 유창한 영어 발음에 늘 감탄을 쏟아냈다. 치졸하고 역겨운 한국어로 된 비속어를 섞은 감탄을. 중한은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바른말만 해댔다. 옳은 표현, 바른 문장구성에 집착했다. 그럴수록 완성되는 것은 그의 영어실력이었다. 중한은 그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집 근처에서 가장 알아주는 대학에 입학했다. 좁은 시야는 좁은 선택지만을 보여줄 뿐이었다. 고향 근처 대학에선 그의 모교 동창회가 성행했다. [그만 뻗대고 한번 나와라.] 유일하게 연락을 이어가던 우중의 문자에 무작정 자리를 박찼다.
이름이 특이해 그 석자만 기억 속에 머물렀던 여자애가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서 싸구려 술집 소파 중간 어디쯤에 앉아있었다. 다들 슬희야, 슬희야 하고 불러 그 애가 그 애인 줄 눈치챈 중한은 뭐에 홀린 듯 그 앞에 앉았다. 평범했던 슬희가 평범하게 예뻐진 얼굴로 술을 홀짝였다. “중한이도 이런 데 나오는구나.” 슬희가 찡그리듯 웃으며 말했다. 중한은 저도 모르게 “너 왜 우리 학교 들어왔어?“ 하고 아는 체를 하고야 말았다. 슬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학교생활이 하고 싶어서.“ 하고 짧게 답했다.
슬희가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덕분에 차가운 방 한가운데에 드러난 중한의 다리가 본능적으로 슬희의 두 다리 사이 어딘가로 끼어들었다. 중한은 팔을 뻗어 슬희의 갈비뼈 사이를 훑다 등허리 위에 걸쳤다. 중한의 출국 일주일 전이었다.
슬희는 중한이 출국하고 나서 단 한 번도 그에게 먼저 연락한 일이 없었다. 우중은 그런 슬희를 자꾸 부추겼다. 이따금씩 중한의 연락이 멀어질 때면 슬희는 한 번씩 엽서를 보냈다. 그 엽서는 늘 우중이 우체국으로 들고 갔다. 슬희는 한 번도 편지 봉투를 봉한 적이 없다. 우중은 중한이 출국하고 일 년이 지난 무렵부터 오래간만에 손글씨를 썼다. 그 손글씨는 슬희의 봉투에 얹혀서 미국으로 전달됐다.
슬희는 종종 텅 빈 한국에서 우중과 술잔을 부딪혔다. 원했던 직장에 입사했을 때도, 원했던 사업을 마침내 성공했을 때도 슬희의 축하주는 늘 우중이 채웠다. 슬희의 바다는 우중이 따라주는 술잔 그 어딘가였다. 물밑에서 사는 존재들이 있다. 누군가의 알코올 밑에서, 곁들여져 흩날린 필체 몇 글자 아래서, 건너건너 들려오는 소식 밑구멍에서.
유영하는 존재에게 심해의 깊이란 중요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