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바람 Oct 02. 2019

#2 나는 자연인과 산다

남편은 소유욕이 없다. 살림을 합쳤을 때 그의 소박한 옷가지와 물건에 놀랐다. 이삿짐에는 계절별로 꼭 필요한 옷과 신발만 있었다. 어떤 옷은 사계절용이었다. 미니멀 라이프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나는 물욕 넘치는 도시 여자다. 할인을 하면 여러 개를 사서 쟁여 놓는다. 둘 다 예쁘면 둘 다 산다. 검은색 티셔츠와 흰색 티셔츠, 회색 에코백과 검정 에코백이 그렇다. 신혼집 옷장 네 칸 중 세 칸은 내가 쓴다. 물건의 점유율만 놓고 보면 집주인은 나다.


그는 15분이면 외출 준비가 끝난다. 샴푸와 보디클렌저, 로션 하나면 끝이다. 나는 외출하려면 최소 40분이 필요하다. 세안할 때는 클렌징 로션과 미용 비누를 쓴다. 머리를 감을 때는 샴푸와 트리트먼트를 사용한다. 샴푸는 지성 샴푸와 탈모 샴푸를 이틀 단위로 번갈아 사용한다. 머리를 말리고 나면 두피 에센스와 헤어 에센스를 차례대로 바른다. 그 다음은 화장이다. 스킨, 에센스, 수분 크림, 선크림, 파운데이션을 바른다. 눈썹 펜을 사용하고, 립스틱과 립글로스로 마무리한다. 필요한 물건의 가짓수가 다르다.


그의 무소유는 장을 볼 때도 흔들림이 없다. 어묵탕을 끓이려고 ‘어묵, 무, 곤약, 파’를 사 오라고 했더니, 지갑을 들고 나간 지 5분 만에 돌아왔다. 너무 빨리 돌아와서 슈퍼마켓이 문을 닫은 줄 알았다. 그의 장바구니에는 정확히 어묵, 무, 곤약, 파가 들어 있다. 음료수나 아이스크림, 과자 따위는 없다. 그의 신속한 장보기 비결은 경주마처럼 좁은 시야다. 목표물만 정확히 골라 담는다.


일상에서 무소유를 실천하는 남편의 세계관이 있다. 바로 자연주의다. 나는 그를 자연인이라고 부른다. 결혼하고 두 달이 지났을 때, 화장실의 무언가가 내 시선을 멈추게 했다. 남편의 비누였다. 화장실에는 비누가 두 개 있다. 왼쪽은 클렌징 겸용으로 사용하는 내 비누고, 오른쪽은 그의 비누다.

그의 비누가 모형처럼 그대로였다.


“손 씻을 때 뭘로 씻어? 왜 비누가 그대로지?”

“나? 그냥 물로 씻는데? 헤헤.”


그는 건성 피부다. 하루쯤은 씻지 않아도 티가 안 난다. 세안을 하지 않는 게 피부 비결이라고 한다. 기적의 논리다. 그가 쓰던 대용량 로션이 최근에 바닥났다. 이때다 싶어 새 제품을 골라주었다. 스킨을 바르지 않는 그를 위해 올인원 로션을 샀다. ‘남자를 아니까’라는 제품의 광고 문구가 ‘남자의 귀차니즘을 아니까’로 읽힌다. 그에게 딱이다. 


그는 피부뿐만 아니라 두피도 건성이다. 주말에는 머리를 감지 않는다. 외출할 일이 생기면 모자를 쓴다. 일요일 저녁이 되면 그의 머리가 착 달라붙어 있다.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한마디했다.


“비 맞았어?”

“헤헤, 자기 전에 샤워할게.”

“우리 집이 사막이야? 물이 귀해?”


양치질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충치가 없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양치질을 싫어한다. 결혼하고 첫 한 달간 그의 습관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타이르고, 화내고, 뽀뽀를 거부했다. 하지만 고쳐지나 싶다가도 제자리였다. 결혼 첫해의 마지막 날, 나는 마침내 폭발했다. 


시작은 좋았다. 치킨에 맥주는 옳았고, 방 안은 따뜻했다. 충분히 배가 부르자 그가 씩 웃더니 치킨을 먹던 손을 씻지 않고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채 5분이 되지 않아 코를 골았다. 타종 행사가 끝나고 그를 깨웠다. 12월 31일이 지나고, 1월 1일이다.


“일어나. 양치질하고 자야지.”

“우웅… 너무 졸려….”


그가 돌아눕는다. 양치질을 하지 않고 자겠다는 의지의 등짝이다. 새해 목표가 ‘매일 양치질하고 자기’였다. 첫날부터 양보할 수는 없었다.

“나 작은방 가서 잔다.”


분명 크게 말한 것 같은데, 그는 움찔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다. 작은방의 매트리스에 가만히 누웠다. 뒤척거리며 안방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이 올까 봐 무서웠다. 이대로 잠들었는데 아침이 오면 각방을 쓴 셈이 된다. 시작은 미비하나 끝은 창대한 부부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새벽 1시, 그가 안방 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양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치약 냄새를 풍기며 그가 작은방에 들어왔다.


“나 작은방에서 잘 거라니까?”

“알았어, 그럼 나도 여기서 잘게.”

남편이 내 옆에 누웠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그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못 이기는 척 몸을 맡기고 남편과 안방 침대로 복귀했다. 그 뒤로 남편은 자기 전에 꼭 양치질을 한다.


이전 01화 #1 내 남편은 비밀 미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