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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바람 Oct 02. 2019

#3 룸 메이트가 생기다

남편은 나의 룸 메이트다. 우리는 집뿐만 아니라 방을 공유한다. 처음 경험하는 관계다. 집에 같이 있을 때 어디까지가 공동의 시간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의 시간인 걸까? 부부는 모든 시간을 함께해야 할까?


결혼하고 한 달 동안은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개인적인 약속을 잡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고, 집이 편했다. 거의 매일 저녁을 함께 먹고, 주말을 같이 보냈다. 연애 기간이 짧아서 신혼이 더 애틋했다.


저녁은 대체로 내가 준비한다. 그가 집에 오는 시간이 늦어서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됐다. 요리 블로그를 찾아서 흉내 낸다. 밥은 이틀에 한 번씩 새로 한다. 주방 식탁에 프랑스에서 사 온 매트를 깐다. 새 그릇에 음식을 담는다. 밥을 먹기 전에 사진을 찍고, SNS와 단톡 방에 공유한다. 엄마와 같이 살 때는 주방 보조였는데, 신혼집에서는 어엿한 셰프다.


서서히 남편과의 얘깃거리가 떨어진다. 우리는 주방 식탁을 뒤로하고,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상을 폈다. 그의 옆얼굴이 익숙해진다. 한겨울이 되자 거실이 추워졌다. 보일러를 켜도 거실이 따뜻해질 때까지는 한참 걸렸다. 난방비를 아낀다는 핑계로 우리의 식탁은 안방으로 또 한 번 이동했다. 안방의 벽걸이 TV는 혼수로 마련한 초고화질 제품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안방 생활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주말이었다.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까지 온전히 붙어 있어야 했다. 그와 나는 집이 제일 편한 집돌이, 집순이 체질이다. 결혼을 했다고 해서 주말마다 외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연말연시의 늘어난 업무로 만성피로 상태였다. 그래서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며 편하게 집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잠 스페셜리스트다. 주말이 되면 마음껏 재능을 발휘한다. 그에게 오전 9시는 새벽이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잘 잔다. 인기척이 없어서 그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적도 있다. 들숨과 날숨이 느껴져서 안도했다.


나는 주말에도 세 끼를 먹는다. 하지만 그는 아침은 건너뛰고 잠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아침을 먹여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인정하게 되었다. 덩달아 나도 아침을 먹지 않게 됐다. 이제 우리는 정오가 지나서야 첫 끼를 먹는다.


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그가 일어나기까지 적게는 세 시간, 많게는 다섯 시간 동안 혼자다. 가만히 누워있자니 심심하고, 텔레비전을 켜자니 미안하다.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나가 부엌 식탁에 앉는다. 작은 방에도 책상이 있지만, 집 한가운데 위치한 부엌 식탁이 마음에 든다. 안방과 가까워서 두 발자국이면 그에게 갈 수 있다.


주말 오전이 심심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신혼 초 나의 관심 분야는 ‘결혼’이었다. 다른 부부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어디까지가 보편적이고, 어디서부터 다른지 알고 싶었다. 책을 읽다 보니 글을 쓰고 싶어 진다. 우리가 만나서 결혼하게 된 과정을 글로 붙잡아두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글을 쓰면 시간이 빨리 간다. 그가 일어날 때까지 혼자 놀 수 있다. 그의 잠은 나의 글이다. 잠자는 남편이 글 쓰는 아내를 만든 셈이다. 글을 쓸 때면 과거의 그와 데이트하는 기분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 진전 없는 시기의 답답함, 헤어졌을 때의 속상함이 재현된다. 글이 안 풀릴 때면 불쑥 그가 보고 싶어 진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안방에 침투한다.


침대 위에는 내 글의 남자 주인공이자 현실 남편인 그가 누워 있다.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는다. 내 손길에 그가 깬다. 흘끗 시계를 보고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인다.


“20분 더 잔다고?”

그가 두 번째 손가락을 자동차 와이퍼처럼 흔든다.

“두 시간 더!”


작게 웅얼거리고는 다시 잔다. 대담한 배팅이다. “묶고 더블로 가.”라는 타짜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잠에 있어서 그는 물러섬이 없다. 나에게는 글 쓸 시간이 두 시간 더 생겼다. 부엌 식탁으로 돌아간다. 신혼집에 들어오면서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이중창을 달아서 외부 소음이 없고, 층간 소음도 없다.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글을 쓰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템플 스테이가 부럽지 않다. 한 꼭지만 쓰려고 했는데 두 꼭지를 쓴다. 그래도 시간이 남는다.


정오가 되자 안방 문이 열리고 그가 나타난다. 뽀뽀를 하고, 화장실로 간다. 나는 노트북을 덮는다. 슬슬 배가 고프다. 점심으로 떡만둣국을 한다. 떡만둣국은 김치만 있으면 된다.


점심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며 같이 뒹굴거린다. 평일과의 차이점을 찾자면 한 시간짜리 TV 프로그램 대신 두 시간짜리 영화를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낮잠을 잔다. 이번엔 나도 같이 잔다. 결혼하고 잠이 늘었다. 낮잠이라기엔 오래 잔다. 자고 일어났더니 저녁 먹을 시간이다. 저녁은 김치볶음밥을 한다. 내일 점심에는 김치찌개를 할 생각이다. 김치는 집밥의 원천 기술이다.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신다. 배가 부르고 나른하다. 그는 침대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10시가 되기 전에 다시 저녁잠에 든다. 그의 토요일이 끝났다.


일요일 아침 10시. 그가 눈을 뜬다. 리모컨을 찾아 텔레비전을 켠다. 동물 농장과 서프라이즈로 일요일을 시작한다. 나도 그를 따라 멍하니 TV를 본다. 서프라이즈가 끝나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잡곡밥을 해서 김치찌개와 먹는다. 배가 부른 지 그가 다시 눕는다. 리모컨을 꼭 쥐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혼자 살 때의 그의 주말이 어렵지 않게 상상된다.


나는 다시 부엌 식탁으로 가서 글을 쓴다. 평일에는 진전이 없던 글쓰기에 가속이 붙는다. 한창 필 받아서 세 시간 정도 글을 쓴다. 문득 그의 안부가 궁금하다. 안방 문을 여니 낮잠을 자고 있다. 잠은 그의 주말 액티비티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틈날 때마다 잔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그와 저녁을 먹는다.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어영부영하다 보니 밤이다. 그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밤 11시에 시작하는 ‘SBS 스페셜’을 보다가 벽시계를 흘끔 본다.


“법정 수면 시간을 지키려면 지금 자야 돼.”

“오늘 낮에 많이 잤잖아. 낮에 잔 건 밤잠에 반영이 안 돼?”

“응. 리셋됐어. 지금부터 다시 7시간 자야 해.”

“그래. 꿀잠 자라. 풀 잠 자라.”

“자도 자도 재밌어. 헤헤.”

그는 잠 마니아다. 잘 자는 건 그의 개인기다. 그는 잠으로, 나는 글로 주말을 보낸다.


월요일 아침이다.

“자기야, 일어나야지. 오늘은 샤워도 해야 하잖아.”

“우웅… 출근하기 싫다.”

“출근 안 하면 뭐 하고 싶은데?”

“더 자고 싶어. 오 분 더! 완전 집중해서 잘 거야.”

집중해서 자는 건 어떤 걸까, 가만히 생각해본다.


오늘도 남편은 참 잘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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