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사랑에 관한 시적 우화(4)

알레산드로 바리코 <비단> 이야기(4/4)

by 책사냥꾼 유은


1. 바이칼 호수, 욕망의 변주곡


에르베 종쿠르가 일본으로 향하는 여정에는 거대한 거울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바로 '바이칼 호수'입니다. 종쿠르는 이 호수를 4차례나 지나게 되는데 주민들은 그 때마다 이 호수를 때로는 '바다'로, '악마'로, '최후의 것'으로, '신성한 곳'이라고 다양하게 표현합니다.


흥미롭게도 호수의 이름이 바뀌는 과정은 종쿠르의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욕망의 파고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종쿠르는 40일이 넘는 고난의 시간을 뚫고 악마의 유혹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속 예수나 모세가 40일간 견뎌낸 인내의 시간과는 달리, 오직 한 여인을 향한 맹목적인 질주였습니다.


2. "당신이 누군지 말해보시오" : 운명이 바뀌는 찰나


누에알을 구하기 기 위해 40여 일의 여정 끝에 종쿠르가 처음 맞부닥친 것은 일본의 지방 영주 하라 케이의 질문이었습니다. 일종의 신뢰 쌓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 긴장된 순간, 하라 케이는 종쿠르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말해보시오."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이 질문과 마주합니다. 입시 면접장에서, 사랑하는 이에게 프러포즈할 때, 혹은 취업의 문턱에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어떤 비전을 가진 사람인지 증명해야 합니다.

종쿠르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한번도 한적 없던 자신의 이야기를 소소 하게 펼칩니다. 프랑스, 바다 여행, 리빌디외의 오디 냄새, 증기 기관차, 엘렌의 목소리를. 때론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하듯 말이지요. 최면에 걸린 듯 그의 이야기 에 매료된 것을 보면 일단 그의 스토리텔링이 효과를 발휘한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라 케이의 무릎에 애완동물처럼 누워 있던 소녀가 찻잔을 들어 종쿠르의 잔에 입을 댑니다. 그리고 종쿠르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합니다. 비로소 두 남녀의 눈이 맞고, 마음이 통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순간입니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

소녀가 입을 댔던 찻잔의 그 자리에 종쿠르가 자신의 입술을 포개는 순간, 그의 운명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한용운 시인의 시구처럼 말이지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종쿠르는 '누에알 상인'이나 '누군가의 남편'이라는 껍데기를 벗고, 오직 한 여자를 갈망하는 단독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을지 모릅니다. 내가 가진 소유와 직함을 모두 떼어내고 완전히 발가벗겨졌을 때, 과연 우리는 스스로를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3.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무거움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삶의 무게와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종쿠르의 사랑은 한없이 '무거운 사랑'입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가로질러 지구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사랑, 가슴 터질 듯한 열망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가벼운 삶을 꿈꾸지만, 쿤데라는 말합니다. "삶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라고요. 종쿠르가 짊어졌던 그 천형 같은 사랑의 무게야말로,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그를 유일하게 '살아있게' 만든 생의 감각이 아니었을까요?



4.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회한


장석주 시인은 이 작품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륜 소설"이라 평했습니다. 불륜이라는 금기어 앞에 '아름다움'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향해 끝까지 나아갔던 한 인간의 순수한 용기와, 그로 인해 남겨진 슬픔의 깊이 때문일 것입니다.

남자는 이별 후 가슴에 봉분 하나를 얹어놓고 산다고 합니다. 종쿠르 역시 평생 그 사랑의 흔적을 가슴에 묻은 채, 바람 부는 날이면 하염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장소를 떠나면서 우리의 일부분을 남긴다. 떠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 남는 것이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곳으로 돌아와야만 다시 찾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중에서—


종쿠르는 몸은 고향 라빌디외로 돌아왔지만, 그의 영혼 일부는 영원히 일본의 그 호숫가에, 그 여인 곁에 남겨두고 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선택한 길'을 걸으면서도 끝내 '떠나온 장소'를 그리워하며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사랑의 화인(火印)을 새기고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에필로그] 끝나지 않은 이야기, 당신의 선택은?


이제 긴 여정을 마칠 시간입니다. 우리는 『비단』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누에알처럼 작게 시작된 우연이 운명이 되고,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되어 한 남자의 생을 뒤흔드는 과정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남편의 욕망마저 끌어안으려 했던 아내 엘렌의 비극적인 사랑이 숨어 있었습니다.

문학은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심연을 탐색하게 하는 마법과도 같습니다. 종쿠르의 삶은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게도 어느 날 운명처럼 낯선 사랑이, 거부할 수 없는 길이 나타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이 책을 덮는 순간,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아련한 물음표 하나가 남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비단』과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keyword
이전 09화『비단』 사랑에 관한 시적 寓話(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