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사랑에 관한 詩的 우화(2)

눈빛과 장갑, 운명의 불씨를 지피다(2/4)

by 책사냥꾼 유은



1. 관조하는 삶에 찾아온 파문


에르베 종쿠르, 그는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보다 그저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보듯' 조용히 관조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직업군인이 될 운명이었으나, 발다비우라는 인물의 우연한 등장으로 누에알 상인이라는 생각지 못한 길을 걷게 되죠. 그러나 운명의 장난은 그를 '세상의 끝'이라 불리던 미지의 땅 일본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여인을 마주하게 합니다.

2. 침묵의 교감, 찰나의 눈빛


흔히 남자를 위험과 치명적인 매력 속으로 빠뜨리는 여성을 '팜므파탈(femme fatale)'이라 부릅니다. 종쿠르에게 하라 케이의 여인이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라 케이의 무릎에 애완동물처럼 기대어 있던 여인, 종쿠르의 찻잔을 들어 입맞춤하던 여인. 서양의 언어를 모르는, 동양인 특유의 찢어진 눈이 아닌 묘한 눈매를 가진 소녀와 종쿠르는 '눈빛'이라는 원초적 감각만으로 서로의 본능을 깊이 교감합니다. 남들에게는 찰나였을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서로의 영혼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밀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한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갑자기 그 어린 소녀가 미동도 하지 않고 눈을 떴다."




3. 던져진 장갑, 에로티시즘의 은유


소녀가 찻잔에 입을 맞추며 먼저 은밀한 신호를 보냈다면, 이에 대한 화답으로 결정적인 구애를 한 것은 종쿠르였습니다. 그는 호숫가에서 오렌지색 드레스를 벗어놓고 목욕하는 여인의 옷 곁에, 아무도 모르게 장갑 한 짝을 떨어뜨립니다.


중세 유럽에서 장갑이나 손수건을 던지는 행위는 사랑을 고백하는 풍습이었고, 상대가 이를 줍는 것은 곧 승낙을 의미했습니다. 종쿠르가 던진 장갑 한 짝은 명백한 구애의 메시지였습니다. 본래 추위와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장갑은 패션의 일부를 넘어 에로티시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심리학자 존 칼 플루겔(John Carl Flugel)은 장갑의 털이나 부드러운 질감이 여성성을 상징하며, 착용자에게 페티시즘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고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종쿠르의 행동은 단순한 관심을 넘어선 농밀한 '성적 구애'였던 셈입니다.





4. 위험한 선택, 그리고 시작된 비밀


그날 밤, 종쿠르는 목욕 시중을 들던 여인에게서 검은 먹으로 새 발자국을 찍은 듯한 일본어 쪽지를 받습니다. 훗날 프랑스로 돌아와 '님(Nîmes)'의 블랑쉬 부인을 통해 알게 된 쪽지의 내용은 종쿠르의 평온했던 우주를 단숨에 무너뜨렸습니다.


“돌아오시지 않으면 죽어버릴 거예요.”


이 짧은 문장은 종쿠르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폈습니다. 소녀에 대한 욕망은 내란으로 휩싸인 일본의 위험조차 무릅쓰게 만들었고, 그는 오직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길을 떠납니다. 무욕의 삶을 살던 관조자 종쿠르는 이제 욕망의 화신이 되어, 금지된 선을 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는 법입니다. 그가 바다 건너의 여인을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내고 있을 때, 등 뒤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를 기다리는 또 다른 여인, 아내 엘렌이 있었습니다.


종쿠르의 가슴속에 새겨진 이 '화인(火印)'은 과연 그만의 것이었을까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한 이 불길은 누군가를 따뜻하게 할 수도, 혹은 누군가를 잿더미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장갑은 던져졌고, 비밀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이 사랑이 치러야 할 진짜 대가를 알지 못합니다.


<3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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