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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서희 Apr 25. 2017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

독거노인의 하루  - 문재규


독거노인의 하루      - 문재규


어정쩡

길 나서는

구부정한

꽃단장


어제의  

꽃빛 놀이

좌판 위에

펼쳐놓고


팔다 팔다

겨우  남은

긴 그림자

홀로 끌며


지친 노을

등에 진 채

빈 지갑에

허무 쓸어 담아


텅 빈

방에 돌아와

적막 베고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학창 때부터 시를 읽으면 그다지 감동을 받지 못했다. 윤동주나 릴케의 시를 읽어도 심금을 울리는 시는 손가락에 꼽는다.


이는 내가 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 흘려 읽는 까닭이고, 곱씹지 않아도 친절하게 읽히는 에세이나 소설들에 비해 작가의 의도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는 즐겨 다가가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연히 시인 한 분을 알게 되었다.


 전에 브런치에 올렸던 글 <꽃보다 아름다운 정원사>의 정원사님 인 중  분신데, 최근 내 브런치의 글을 읽고  주시는 분이다.


후에 알았는데 이 분은 시 부문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시고 시집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을 출간하신 시인이셨다.


내 글을 정성껏 읽어 주시며 댓글을 달아 주시는 성의가 고기도 했지만, 그보단 시집 제목호감이 일어 시집을 사서 읽고 싶어 졌다.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이란 제목이 하게 맘에 와닿았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이 시집을 소개했더니 고맙게도 그 친구가 선물해 주어 내겐 더욱 의미 있는 시집이 되었다.


시집 <바람이 열어놓은 꽃잎> - 문재규


처음 시집을 대할 때 느낌은 무척 소박해서 80년대의 오래된 시집을 보는 듯 정감이 들었다. 표지 디자인도 그랬, 꾸밈없는 바탕채의 글씨채와 화소수 떨어지는 삽화 사진들이 그러했다.


작가 프로필에 부모님과 아내, 자녀들의 이름을 소개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시를 쓰며 가족들에게 불편 준 것을 사과하는 모습, 생전에 출판하여 보여 드리지 못한 아쉬움으로 부모님 영전에 책을 바친다는 것에서, 시집만큼이나 소박하고 스한 시인의 심성 흐뭇하게 전해져 왔다.


 출간 축하글을 쓴 한 문예창작 지도교수인 박덕은 씨는 이 시인의 시시인 문재규 님을 각별히 아끼시는 분듯했다. 열 페이지에 달하는 긴 축하문에는 시인의 시 다섯 편에 자신의 느낌을 담아 수록하고 시인의 인품과 필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시인의 이름으로 서시를 쓸 정도이면 그  마음이 어느 정도 인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서시 <문재규> - 박덕은


서두에 소개한 시는 그중 하나인 <독거노인의 하루>이다.


독거노인의 하루

어정쩡
길 나서는
구부정한
꽃단장

어제의
꽃빛 놀이
좌판 위에
펼쳐놓고

팔다 팔다
겨우 남은
긴 그림자
홀로 끌며

지친 노을
등에 진 채
빈 지갑에
허무 쓸어 담아

텅 빈
방에 돌아와
적막 베고 누워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이토록 간결한 시구에 독거노인의 하루를 넘어 화려했던 노인의 젊은 날 초상까지 담을 수 있었던 것 놀랍고, 읽어 내려가며 오롯이 전해오는 독거노인의 허무와 외로움과 쓸쓸함에, 알 수 없는 슬픈 전율이 온몸을 감쌌다.


축하문 속의 시 풀이를 빌어(수정해 옮김) <독거노인의 하루>를 감상해 보자.


허리가 굽은 한 노인이 공들여 단장하고 외출을 한다. 어제의 꽃빛 놀이를 보면, 과거는 꽤나 멋스럽게 살았나 보다. 낭만도 있었고, 부유함과 풍요로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 좋았던 젊은 날의 회상들을 좌판 위에 펼쳐 놓고, 이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다. 추억을 팔다 팔다 겨우 남은 건 여울진 햇살에 끌려오는 자신의 늘어진 긴 그림자뿐. 지친 노을을 등에 진 채 빈 지갑엔 허무만을 쓸어 담고, 홀로 텅 빈 방에 돌아와 적막을 베개 삼아 누워 이리저리 뒤척인다. 밤 새 잠 못 드는 한 노인의  인생무상이 참으로 허무하게 전해온다.


독거노인의 하루


제1장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의 미소
제2장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의 눈물
제3장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의 의미
제4장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의 풍경
제5장 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의 노래


<바람이 열어놓은 꽃잎>의 1장과 2장에서 시인은 절절한 사랑의 환희와 그리움, 이별의 아픔이 짙게 묻어 있는 노래들을 부르고, 3장에서는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며, 때로는 회한을 때로는 더욱 농익은 사랑을 꼭꼭 부여 안은 채 인생 속에 그 의미를 불어넣고 있다. 또한 시인의 사랑에는 외면당한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두운 삶들을 보듬는 따뜻한 마음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제4장). 마지막으로, 회한과 그리움의 시들로 살아온 인생을 차분히 정리하듯 이 아름다운 시집은 마무리된다(제5장).



행복. 1


한 잔
놓고

마주
바라보고만
있어도

마냥
선계가
열리는 듯.


사랑. 2

창문 밖 꿈이
시리도록 푸르른 건
그리움

연둣빛 느낌이
온종일 나붓거리는 건
기다림

여린 낭만이
비껴 밀고 들어온 건
설렘

아린 마음결이
향내로 스미는 건
포옹



사랑. 4

두고 감이
아림이면

보낸 가슴
도림이요

떠남이
위함이면

보냄은
기다림이라

떠났다고
보내지 말고

보냈다고
떠나지 마오

하나 되는
바로 그날

안고 흘릴
눈물 위해.



산정

쳐다보면
아득히


걷다 보면

아련한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운무에 휘감겨

물안개
걷히고 나면
은은한 황홀경

바위에 기대어
잠시 쉬면
빈 바람 공명뿐

올라 보면
저  아래
등 굽은 추억만.



산정


문재규 시인의 시는 시구 한 마디 한 마디 허투루 쓰거나 억지로 꾸미려 하지 않는 것에서 진솔함이 묻어 있고, 최대한 간결한 시구에 시인의 인생을 오롯이 담았다. 더하여, 해주고픈 말을 곳곳에 수줍은 욕심으로 담는 마음이 이 시인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



인생. 2

하늘을
끌고 가는 호수
호수를
밀고 오는 하늘

바람을
끌고 가는 구름
구름을
밀고 오는 바람

햇살을
끌고 가는 노인
노인을
밀고 오는 햇살

이런들 어떠랴
저런들 어떠랴
가면 오고
오면 가는 것을.



선물

해맑은 눈빛
순수로 아름답게

펼쳐진 무지개
안고 가거라

길지 않고 짧은 길
사랑만도 부족하다

너그럽게 수그리며
정성껏 내밀어

다시 보고플
그리움을 남겨라

가방 속 열어 보니
줄 건 이것뿐.


'다시 보고플 그리움을 남겨라'

이 시구에 오래 마음이 머문다. 



모처럼 한 마디 한 마디 곱씹어가며 새기고 싶어지는 시들을 만났다. 가슴에 머문 설렘과 따스한 온기를 오래 간직하고 쓰다듬고프다.


어느 부분,  감히 나와 닮아 있다는 착각에 배시시 웃음 지으며, 오늘도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열어 놓은 꽃잎들 하나씩 음미한다.





살랑살랑 봄바람 드는 4월 어느날에..



관련 글

<꽃보다 아름다운 정원사>

https://brunch.co.kr/@seoheek/35


<오공이 밥 가져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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