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이 내게 가르쳐준 것
나는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어린 시절 교회에서 배운 가르침과, 나이를 먹으며 읽어온 수많은 책들은 늘 같은 곳을 가리켰다. 하지만 교사가 된 후, 나는 종종 내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깊은 의문에 빠지곤 한다.
임용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나는 설렘으로 가득했다. 길을 지나는 중학생들만 봐도 '아, 내가 곧 가르칠 아이들이구나' 하며 심장이 뛰었다. 교사가 된 첫해에는 주말에도 아이들이 보고 싶어 빨리 출근하고 싶을 정도였다. 밤이면 아이들 사진을 들여다보며 잠들곤 했다. 나의 '다정함'이 교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교실에는 단호한 규칙과 따뜻한 다정함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믿음은 '다정함' 쪽에 조금 더 기울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이들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강력한 힘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의 다정함은 종종 무력했다. 선의로 베푼 이해는 '만만함'으로 돌아와 이용당하기 일쑤였고, 끝까지 믿어주려 했던 마음은 아이의 거짓말 앞에 무너졌다. 냉정한 규칙과 제재를 요구하는 목소리들 속에서, 나의 가장 소중했던 믿음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다. 변화 없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씩 힘이 빠졌고, 어느 순간 아이들 앞에 서는 게 부담이 되었다. 남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 앞에서, 정작 나 자신은 길을 잃고 있었다. 나야말로, 누군가의 가르침이 가장 절실한 사람이었다.
문득 김용택 시인의 시 ‘첫사랑’ 속 '사랑도 다 낡아간다네'라는 구절이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나의 열정도, 아이들을 향한 나의 사랑도 결국 이렇게 낡아가는 것일까. 정대건 작가의 소설 『급류』 속, 사랑의 이상을 믿는 '예지'의 모습 위로, 현실에 지쳐가는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그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는 아닐까.
그렇게 나의 믿음이 난파선처럼 흔들리던 어느 날이었다.
타 교과 시간에 배지를 만드는 활동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께 드릴 배지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댄스부 리더이자, 평소 나를 잘 따르던 학생 정윤이(가명)가 나를 찾아와 작은 배지 하나를 건넸다. 정윤이는 우리 반 학생이 아니었다.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옆 반 아이였다.
그 배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항상 다정하신 사회쌤, 그저 빛...”
그 문구를 보는 순간, 나는 무너지는 듯하면서도 따뜻하게 채워졌다. 내가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내 수업을 듣는 수많은 학생들 중 한 명. 그 아이가 다른 모든 사람이 부모님을 떠올릴 때, 나를 떠올려 이 작은 선물을 만들었다.
정윤이에게 수업 중 건넨 사소한 말, 복도에서 건넨 작은 농담, 때로는 무심히 건넨 ‘괜찮아’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매던 순간에도, 나의 서툰 다정함은 나도 모르는 사이 한 아이의 기억 속에 남아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정윤이는 학생이 아니라, 길 잃은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스승이 되었다.
그 작은 배지는 내게 '네 가치관이 틀리지 않았다'고, '너는 잘하고 있으니 조금 더 힘내'라고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응답이었다. 나는 그 배지를 매년 옮기는 교무실 책상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둔다. 나의 믿음이 다시 흔들릴 때마다, 그 작은 빛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그제야 나는 톨스토이가 옳았음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사랑은 정말 낡아가는 것일까? 그렇다. 불같던 열정은 식고, 무력감에 지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 낡지 않는 사랑도 있다. 내가 건넨 작은 다정함이 한 학생의 마음에 가 닿고, 그 학생이 다시 내게 건넨 작은 배지 하나가 나의 흔들리던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처럼.
이 사소하지만 낡지 않는 사랑의 순간들이, 나를 움직이고 다시 아이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나는 이제, 다시 흔들리지 않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그리고 교사는, 결국 사랑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