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나의 초등시절 기억은 약 2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초등학교 입학부터 4학년까지는 도심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녔고, 4학년의 겨울방학 즈음에 부모님은 도시의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작은 군단위의 시골로 귀촌을 하셨다.
모두가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시골을 떠나 도시로 기반을 마련하려 할 때, 엄마는 반대의 선택을 하셨다. 모두가 엄마의 선택을 의아해했다. 가까운 친인척마저 엄마의 선택에 의문을 가지고, 확신의 응원을 보태주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에야 다양한 매스컴을 통하여 귀농 귀촌에 대한 시선과 관심도가 높아지고, 실제로 도심을 떠나는 중장년층이 많아졌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나올 2000년대만 해도 도시를 떠나 자발적으로 시골로 들어오는 젊은 가족들이 많지 않았던 걸로 기억 남는다.
시골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고작 2년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울고불고 생난리를 피웠던 것에 비하면, 4년을 머물렀던 도심의 초등학교를 떠나오는 것에는 굉장히 무덤덤했다. 이별, 떠나감, 끝이 나는 모든 일에 서러움과 질척거림이 최고조에 달하는 나의 성향상 25년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별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던 순간인 듯하다.
초등학교의 기억은 채 2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 도심 학교에서의 떠오르는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기억들이 많은 시골의 2년에 비하여 도시에서의 4년 동안의 기억은 얼마 없다. 아참, 딱 한 가지 떠오른다.
4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취미로 비즈 공예를 하셨는데, 선생님의 실력은 거의 준전문가 급이셨다. 바글바글했던 교실에 몇 번의 종소리가 울리고 나면 인정받지 못한 사연과 변명을 가진 학생들이 남아 들썩이는 궁둥이를 붙이고 못다 한 숙제를 했다. 선생님께서는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계시며 조용히 알록달록한 비즈 알을 굴리셨다. 검사를 받으러 나간 선생님의 책상을 빠르게 스캔하며, 이번에는 무엇을 만드시냐고 속삭였다. 선생님의 목에 걸려있던 진주 목걸이는 선생님이 차곡차곡 엮어 만든 고-급 작품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것에 반해 나는 인생 첫 인터넷 쇼핑으로 비즈를 구매해 참으로 촌스러운 반지들을 너무 예쁘다며 직접 만들어 끼고 다녔다. 학기 후반에는 수준급으로 대량생산을 해내던 실력까지 도달하게 되며, 엄마와 친구들의 손가락에 비즈 반지를 선물하였다. 그것이 그곳에서 남은 유일하게 선명한 기억이다.
도심의 학교에서는 마치 관계의 유통기한이 정해져있듯이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매번 친구들을 새로 사귀어야 하는 버거움이 있었다. 학급 수가 많은 만큼 교류가 적을 수밖에 없었기에 반이 갈라지게 되면 함께 했던 친구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지나치는 복도 속 동갑의 친구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비해 시골의 학교는 한 교실에 서른 명이 넘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시골의 학교는 학급 수가 적어 같은 연도에 입학한 모두가 서로의 사사롭고 은밀한 추억을 나누어 가진 채 졸업하기까지 함께 커갔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도심의 학교와 달리 시골의 학교에서는 한 층을 나눠 쓰는 모두의 이름과 별명을 알고 지냈다. 전학 간 첫날은 아주 드라마틱했었다. 내게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만한 장면이었으니 말이다. 도시에서 전학 왔다는 친구에게 모두의 관심이 쏠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궁금증을 품은 너도나도 전학생의 자리에 바글바글 모여 교감을 나눴다.
한 학년 당 두 학급뿐이라 공동수업을 하던 날은 모든 학년의 학생들이 모여 시끌벅적 노는 날이었다. 물론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모두가 모인 복도는 학교가 떠나가라 시끄러웠다. 그 당시 학업으로 인해 도시의 선생님보다 덜 지쳐있던 시골의 선생님들은 건물들이 즐비한 도심에서 누릴 수 없는 시골의 자연환경을 활용하셨다. 여름에는 천에 가서 물장구치며 넘치는 에너지를 쏟아 부었고, 겨울에는 눈싸움 단체전과 눈사람 만들기 대회를 개최하며 마음껏 뛰어놀았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그 나이 때 가지는 건강한 고민을 안고 사는 행복한 초등생이었다.
이렇게 내 초등학교 기억은 시골 초등학교에서의 2년의 기억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학교 근처에 몰린 학원들을 가기 바빴던 도시 학생들의 삶에 비해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던 나와 아이들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삶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의 나는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초등학생의 학업 성적은 누구의 만족일까.
진정 초등학교에서 누리고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바른 잣대를 가지고,
더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어른들을 조르고 싶은 늦은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