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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품있는그녀 Mar 01. 2024

나도 떠나기로 했다.

당신과 있던 그곳에서


나도 떠나기로 했다. 남겨진 아픔은 너무 크다. 남겨진 곳에서 숨을 쉰다는 것이 고통이었다. 떠나간 이는 여행을 가는 느낌일까. 떠나간 이의 그림자를 보며 사는 기분이었다. 전세 재계약 시기가 왔다. 나는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이사를 결정했다.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정하면서 나의 상황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집은 남편의 집이었다.


어차피 재산분할을 해서 여차저차 내 명의가 된다고 해도, 이 집은 10여 년간 남편과 함께 살던 집이다. 남편은 집을 나갔지만 종종 집에 와서 빠트린 자기 물건을 찾아갔고, 아이들과 만났으며, 아직 이혼도 하지 않았는데 주 1회 면접교섭권을 이행하고 있었다.


이미 나간 사람이, 내가 싫다며 나간 사람이, 수시로 집을 드나드는 것은 정신적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 오기로 한 2~3일 전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아이들에게도 짜증이 났다.


남이 되어버린 남편은 이혼의 과정에서 이제 적이다. 등 돌려 떠난 남이 내 집에 수시로 드나들며 아이들과 놀고 떠난다.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좋지만, 나의 치부를 보기에도 쉽다. 남이 된 사람은 더 이상 내 편이 아니다. 그래서 이 집에 계속 살 수가 없었다.


4인이 살던 넓은 평수의 비용도 나 혼자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직장을 그만두게 될 것을 생각하니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중에 큰 집은 내 사정에 맞지 않았다.


종사해 왔던 일의 특성상 나는 지역 내에 많이 알려졌다. 모르자면 모르겠고, 알자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지역사회 신문에 기사 좀 나가는 그런 일을 했다. 그래서 얼굴도 많이 팔렸고, 알음알음 내 사정은 퍼져나갔다. 내 사연은 이제 모두가 아는 비밀이 되었다. 그를 알게 된 이들의 안쓰러운 눈빛이 고맙지만 싫었다. 


그래서 이곳을 뜨기로 했다. 어차피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지역을 아예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도, 친한 친구도, 그리고 아이들의 친구들도 모두 연을 끊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네가 왜 피해를 봐야 하냐?"라고. 피해를 보는 것일까? 어쩌면 성장일 수도 있다. 사람은 경험하며 배우고, 아픔으로 성장한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이왕 아프게 겪을 일이라면 성장하며 겪고 싶다.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아이들과 함께 이 순간들을 겪어나가며,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면, 기꺼이 겪을 수 있는 피해다.


차라리 내 주변이 모두 낯설다면, 남편 없이 독립해 살아가는 낯선 삶이 특별한 허기로 다가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허기를 채우려 허접한 인연에 매달릴 필요도 없고, 온기를 찾아 누군가의 둥지를 두드릴 필요도 없다. 내 사정을 너무 잘 알아 쓸데없는 과잉 친절을 어떻게 적절히 사양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새 삶을 시작하면 된다.


나도 떠나간다. 그리고 멀리 떠나간다. 남편의 그림자로부터, 나의 이혼으로부터. 그렇게 온전한 나로서 홀로서기에 전념하려 한다. 외로움도, 이별의 아픔도, 혼자라는 서러움도 모두 새 삶의 터전에서의 적응기로 맞서보려 한다. 이런 나의 결정을 누군가 응원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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