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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아키 Jan 01. 2023

흰 숲을 따라 오르는 전망대

자라나는 숲

건축이라는 단어는 무겁다. 얼마나 무겁냐면, 건축이라는 글자를 써넣는 순간 머릿속에 그리스 로마 신화에나 나올 법한 신전의 기둥이 떠오를 정도로 무겁다. 멀리 그리스까지 가지 않더라도, 주변을 둘러보기만 해도 우리는 이미 두꺼운 콘크리트 기둥으로 떠받치고 있는 높은 빌딩들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다. 현대의 건축은 수많은 이해관계와 첨단 기술과 기능을 모두 끌어안고 있어 의미마저도 퍽 복잡하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세상에는 가벼운 건축들도 존재한다. 직관적이고, 어렵지 않고, 딱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둥실 떠올라 있는 것처럼 가벼워 보이는 무언가. 건축이라기보다 예술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가벼운 건축들은 등잔 밑이 어두운 것처럼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흰 숲을 따라 오르는 전망대


천호대로를 건너 아차산으로 향하는 길목, 흰색 기둥들의 묶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일 땐 통신탑처럼 보이기도 하고 체육시설의 펜스처럼 보이기도 하다가 거리가 가까워지는 순간, 이것이 단순히 효율과 기능만을 위해 세워 올려진 조형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울어진 여러 기둥들의 다발은 주변의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생경한 풍경을 만들어 내고, 그 모습에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흰색의 나무들을 심어 숲을 만들고 싶었구나.



17m 높이로 삐쭉하게 솟아오른 흰색 기둥 다발은 건물로 따지자면 4층에서 5층 정도의 높이로, 기둥 사이로 올라가 한강과 아차산 그리고 서울 도심 곳곳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 천호대로로 단절되었던 산자락이 다시 복원되는 과정에서 지어진 전망대이자 공공예술작품인 '자라나는 숲(Growing Forest)'은 네임리스 건축과 정소영 작가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이곳에는 무려 200개가 넘는 기둥이 박혀있다. 나무가 꼿꼿하게 수직 방향으로만 자라지 않듯, 이곳의 기둥들도 각각 미세하게 다른 각도와 방향으로 꼽혀있다. 언뜻 흰색 무더기의 수직재로 보이기만 하던 자라나는 숲에 가까이 다가가면 기둥들의 사이로 길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나무들이 슬며시 몸을 비켜줘 입구를 만들어 준 오솔길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서면 빛과 바람이 스치는 공간 속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외부도 내부도 아닌 이곳에서 산책을 하던 주민들은 잠시 햇빛 또는 비를 피해 숨을 돌릴 수 있다. 



기둥 사이를 한 바퀴 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면 흰색의 기둥들이 뻗어 올라간 모습이 생경하다. 기둥 사이로 햇빛이 내리고, 그림자가 시간에 따라 움직이는 모양새가 자라나는 숲의 모습을 다채롭게 만든다. 계단을 통해 꼭대기 층으로 오르며 자연스레 기둥과 기둥 사이 달라지는 전망을 관찰하며 수직적인 산책로를 즐길 수 있다. 분명 기둥이 세워져 있는 것뿐이니 막혀있는 공간이 아니건만, 기둥이 박힌 것만으로 느껴지는 공간감이 있다.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는데, 하부에서부터 자라나고 있는 덩굴이 있었다. 몇 년 사이 사람의 키를 훌쩍 넘겨 흰색의 기둥 숲을 오르고 있는 덩굴은 시간을 삼키며 아마 가능한 한 높이 다다르려고 할 것이다. 이곳의 이름이 '자라나는 숲'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단순히 기둥이 높이 치솟아 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해를 넘기며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자라나는 숲


예술과 기술 사이 어느 지점엔가 자리하고 있는 건축은 오로지 개인의 것일 수 없고 도시의 일부로서 타인에게 보이고 이용될 수밖에 없는 공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가받는 위치에 있다. 특히 자라나는 숲처럼 세금으로 지어진 공공건축물은 더욱 그렇다. 그러니 자라나는 숲을 지나며 다들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전망대가 이렇게 생길 필요가 있나?


뉴욕에는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베슬이라는 전망대가 있다. 마치 곤충의 몸통 같기도 하고, 벌집 같기도 한 이 조형물은 굉장히 많은 논란 속에 지어졌고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명실상부한 관광지이자 랜드마크가 되었다. 지금껏 없던 공간에서 사람들은 뉴욕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 공유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낯섦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이 만들어 주는 묘한 감각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면, 취향을 떠나서 그 건축은 가치가 있었다고 여긴다.


자라나는 숲에 처음 발을 디딜 때, 이상한 나라로 들어가는 토끼굴을 눈앞에 둔 앨리스를 상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전혀 다른 색과 규칙을 가진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아차산의 입구일 뿐인데도, 몽글몽글한 상상들이 퐁퐁 튀어올랐다. 단지 전망대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그러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낯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이곳에서 그러한 신기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에 희한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없고, 도무지 왜 이렇게 만든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말이다. 이상해도 좋고, 독특해도 좋고, 굳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세상을 재밌고 다양하게 바꾸는 것은 아마도 그러한 것들이다.




샘터 2023년 1월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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