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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열한백구 Aug 10. 2019

어쩔 수 없이...

정신 방어기전 - 합리화

어쩔 수 없이



나이트 근무를 마치고 잠을 자고 있는데 등이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기에 창문을 열어 놓았나 싶었다.

잠에 취해 반쯤 고개를 드니 문지방을 넘어 빗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안은 이미 물난리가 난 상태였고, 현관문 사이로 빗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5년 전 부산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뉴스에서만 봐오던 수재민이 되었다.

물이 차오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누전으로 집 안에 전기가 나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을 것이다.

'물을 막아야 하나?'

'뭐부터 챙겨야 하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돌아다니고, 눈 앞에서는 비현실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기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빗물이 허벅지쯤 차 올랐을 때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고, 물 때가 바뀌면서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된 바닥이 드러났고, 하루 종일 청소하고 또 몇 날을 정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진정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을 겪은 후로 나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사용했던 이 말이 내 행위나 결정에 대한 책임회피용 또는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만나면 다들 아가씨라 어쩔 수 없이 나이트에 가요"

라는 친구 부인의 말이나,

"어쩔 수 없이 줬어요"라는

근무 인계 중 어떤 결정에 대한 이유로 이 말이 나오면,

나는 정말 화가 난다.

진정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알려 주고 싶고,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서 왜 그렇게 합리화할 수밖에 없는지 따지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합리화는 정신 방어기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방어기전이 있고,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이러한 방어기전이 있다.

합리화도 정신 방어기전 중 하나이고, 무의식 적인 것이기에 사용자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방어기전이 작동된다는 것은 그 부분이 취약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것을 직면시키려고 하면 당연한 저항이 따라오게 된다.


나는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결정에 대해서도 다른 이유를 준비해 놓는다.

버릇처럼 이 말을 사용하다 보면, 서서히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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