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쇼는 말했다.
“청춘이란 단어는 청춘에게 주긴 너무 아깝다” (버나드 쇼)
그 유명한 ‘쌈, 마이웨이’를 봤다.
어렵게 뒷바라지해온 고시생 남친이 보리밥집 아줌마랑 바람이 나고,
하필이면 그 차에 타고 집에 돌아와야 하는,
아나운서가 꿈이었지만 지금은 백화점 안내데스크에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주인공.
몇 장면만 봐도 억척스러운 성격과 쌈이라는 단어가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보면서는 마구 웃었는데 묘하게 여운이 남는다.
드라마의 뒷맛이 꼭 씁쓰름한 열매를 먹은 것 같다.
그렇다. 이 시대의 청춘은 왜 그렇게 씁쓸한가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시대의 청춘은 더 이상 푸르거나 장밋빛 환상과 거리가 먼 단어가 돼버렸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높은 실업률과 동의어이고 반값등록금을 외치는 세대인 청춘. ...
내가 청춘일 때 나는 ‘너는 좋겠다. 젊잖아. 청춘이고.’ 같은 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IMF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실업률 같은 단어가 청춘의 목을 조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청춘을 벼랑 위에 세운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어른이고 기업이고 이미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갖춘 이들 말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어려운 시대에도 호사스럽게 생활하고 먹고 마셨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일궈놓은 일터에서 청춘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소모되고, 4년 동안 들어간 등록금을 갚느라 등골이 휜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사회를 정상으로 만들기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 그 시간 동안 청춘의 삶은 얼마나 더 우울해져야 하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미안하지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꿈을 가져야 한다고.
버나드 쇼는 말했다.
청춘이란 단어는 청춘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청년들이 희망을 잃으면 이 땅에도 희망이 없다.
청년들에게 희망과 일자리를 돌려주자.
지금이라도 그들에게 일어설 힘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궁금해서라도 끝까지 봐야겠다.
주인공이 과연 아나운서의 꿈을 이룰지. ...
아, 아니다. 우리는 그가 꿈을 이루도록 조용히 응원하는 게 좋겠다.
잃은 사랑보다 더 멋진 사랑도 하고, 꿈도 이루고 돈도 넘치게 갖게 되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