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e Jun 06. 2020

딸과 수박

임신한 당신의 딸도 수박을 먹는다.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여름과일을 엄청 드셨다고 했는데 막달 즈음해서는 늘 수박과 복숭아를 늘 챙겨 드셨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릴 때 복숭아랑 수박을 참 좋아했다. 무더운 여름,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큼지막하게 썰어둔 수박을 먹고 있으면 엄마는 어느샌가 옆에 와서 내가 뱃속에 있을 때 이걸 그렇게 먹었다며 이야기해주셨다. 




임신하고 나서부터 나는 마트의 과일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있다. 과일코너에 여름 과일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요즘까지 늘 냉장고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바로 수박이다. 캐나다에서는 한국처럼 매우 커다란 수박보다는 아기 머리통만 한 작은 미니 수박이 인기가 많다. 작은 미니 수박 한 통 하고 노랗게 잘 익은 허니듀를 사 오는 날은 부엌 한편에 수북하게 껍질이 쌓이는데 이걸 보고 있으면 곧 먹을 생각에 기분이 괜히 좋다. 먹기 좋게 잘라 커다란 반찬통이나 큰 접시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주면 끝. 먹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바로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이런 내 모습이 낯선지 남편은 과일을 먹을 때마다 괜히 신기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곤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과일을 잘 안 사기 때문이다. 남편이 정말 먹고 싶어서 사 오는 거 아니면 내가 장 볼 때 사는 일이 거의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냉장고에 들어있던 과일을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과일을 잘 안 챙겨줬었는데 신기하게도 임신을 하면서부터는 떨어지지 않게 늘 챙겨 먹고 있다. 과일을 먹다 보니 아쉬운 점이 한 가지 있는데 캐나다에서는 한국처럼 정말 달달한 수박을 찾는 건 좀 어려운 일 같다. 이곳의 과일 대부분이 한국만큼 단맛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곳 사람들이 딸기에 초콜릿을 묻히거나 설탕 뿌려 먹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엔 왜 저렇게 먹나 싶었는데 달달한 과일을 위해서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한국에서 먹던 그 수박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삭아삭 시원한 수박을 먹는 건 요즘 나의 최고 행복 중 한 가지이다. 




마트의 수박을 보며 문득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내 임신소식을 듣고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에서 흐느끼셨다. 그 당시에는 우는 엄마의 모습을 휴대폰 너머로 보고 있는 것이 민망하기만 했었는데 지금은 왜 그러셨는지 조금 알 것 같다. 당신이 겪었던 힘듦을 똑같이 겪을 내가 안쓰러웠을 것이다. 출산까지 가기 위한 그 길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 때문에 왈칵 눈물이 난 것이겠지. 뒤에 따라오는 육아라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커다란 문 앞에서 허우적대는 당신 딸이 눈 앞에 아른거렸을 것이다. 당신 딸은 그 험난한 길을 걷지 않길 바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결혼한 딸의 임신소식은 당신 딸이 하자가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참 아이러니 하지만 그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끼셨을 것이다. 


문득 엄마의 임신은 어땠을까 싶다. 습하고 더운 여름날 커다란 수박이 먹고 싶어 그 무거운걸 한창 만삭인 몸으로 들고 집까지 걸어와서 먹었을 엄마를 생각을 하니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슬픈 걸까. 문득 아빠는 엄마를 위해 수박 한 조각 잘라본 적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럼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나의 엄마가 나에게 그랬듯 나는 나의 딸을 위해 냉장고 한편에 있는 수박을 한 통 잘라야겠다.





이전 02화 결혼에서 임신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