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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Jun 06. 2020

추석엔 탕국

올해 추석엔 탕국을 끓여야지.

9월이 되니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아직 조금은 이르지만 가을이 왔구나를 느끼는 요즘 확실히 한국 음식이 많이 생각난다. 임신 22주 차를 맞이한 나는 입덧이 끝나면서 굉장히 잘 먹고 있는데 이맘때 먹던 탕국이 생각난다. 평소에는 먹지 못하는 등급 좋은 소고기 한 덩이를 맑은 물에 담가 핏물을 빼는 것으로 시작하는 탕국은 간단하지만 그 맛은 매우 깊다. 핏물을 뺀 소고기를 한입 크기로 듬성듬성 썰고, 잘 익은 제철 무와 두부를 깍둑썰기 하면 끝. 우리 집에서 끓이던 탕국엔 이 세 가지가 전부이다.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된 재미있는 점은 지역마다 또 집집마다 탕국에 들어가는 재료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부산에 살던 이모는 탕국에 문어를 넣으셨고, 시댁 식구들은 탕국에 표고버섯을 넣어 드신다고 한다. 작은 땅떵어리지만 집집마다 먹는 형태가 참으로 다르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탕국은 끓이는 방법도 매우 심플 그 자체이다. 참기름을 두른 큰 냄비에 썰어놓은 고기와 무를 달달 볶다가 고기 겉면이 익으면 물을 넣어 팔팔 끓여준다. 무가 투명 해질 때쯤이면 불을 줄인 뒤 두부를 넣어 오랫동안 끓여주면 완성. 간도 특별할 게 없다. 국간장과 소금을 넣어 간을 하는데 조금 심심하다 싶으면 소금을 좀 더 넣어 간을 맞추면 되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도 날씨가 추워지니 이 맛이 계속 생각난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국의 추석이 다가올 때쯤이면 남편과 둘이 먹을 만큼의 전을 했었다. 재료를 다듬고 썰고 밀가루와 계란물을 준비하고 넉넉한 기름을 둘러 뜨거운 팬 앞에서 하나씩 익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앞 뒤가 노릇하게 익었을 때 잽싸게 꺼내 줘야 하는 매우 번거롭지만 기름져서 맛있는 그런 음식. 손이 많이 가지만 전만큼 추석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탕국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추석의 모습은 여느 집들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남자들은 방에 모여서 술 한잔씩 하시면서 시간을 보내고 여자들은 부엌에 옹기종기 모여 수많은 음식들을 해내고. 당시 많은 집들이 그렇겠지만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어렸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음식을 만드는데 참여했었고 어른들과 같이 하는 그 시간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면서 자랐다. 나의 엄마는 추석 때 전을 주로 많이 부쳤었다. 엄마 옆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하나둘씩 집어주는 전들이 프라이팬에 올라가는 것을 보며 하나라도 몰래 먹으려고 어른들 눈치를 보던게 생각난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먹을 음식들을 엄마는 큰어머니들과 다 같이 나눠서 함께 만들긴 했었지만, 나이가 많은 순서대로 조금은 편하게 할 수 있는 차례음식을 담당했었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는데 상대적으로 손이 덜 가는 것들은 짬이 안 되는 엄마에게까지는 오지 않았었던 것 같다. 막내아들인 아빠의 서열과 함께 우리 엄마도 그 집에서는 막내가 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바로 캐나다로 오게 되면서 사실 남편 가족들의 명절 행사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제사를 도와주러 간 적이 있다. 당시 예비 시댁 어르신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갔는데 전처럼 소위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을 장에서 사서 하시는 모습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과 동시에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을 무조건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고집하던 아빠의 가족들 때문에 한 번도 쉽게 명절을 준비한 적 없었던 우리 집을 생각하니 조금은 슬퍼졌다. 지금은 다들 돌아가시고 사촌들이 결혼하고 왕래가 적어지면서 음식을 거의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가지 음식은 직접 만드는 엄마를 보면서 임신한 나는 문득 내가 뱃속에 있을 때의 엄마가 슬퍼졌다. 고작 둘이 먹는 음식을 하는 동안에도 내 몸이 이렇게 힘이 드는 데 그때는 오죽했으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석 음식은 그저 한국의 추억을 불렀지만 임신을 한 지금의 나는 추석 음식을 바라보며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단순히 한국의 가족의 그리움이 아닌 음식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뒤섞인다.  


부엌 한편에 우두커니 서서 탕국을 끓이시던 큰어머니는 펄펄 끓는 국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맛있게 먹을 가족들? 아니면 큰어머니의 가족? 결혼을 했을 땐 몰랐는데 아이를 갖고 보니 이게 가족의 따뜻했던 기억이 아니라 쓸쓸했던 기억이 되버렸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음식을 하는게 이렇게 서러운 일일줄이야. 




캐나다에서 맡는 추석은 특별할 게 없다. 따로 쉬는 것도 아니고 학교를 가고 회사를 가고 평소와 다름없이 하던 일을 한다. 하지만 많은 한국 가정들이 이곳 캐나다에서 추석을 각자의 방식대로 맞이할 것이다. 추석 때 먹던 음식을 몇 가지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또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전이나 왕창 만들어서 며칠 내내 먹었겠지만 올해 나는 조금은 수월하게 만들 수 있는 탕국을 끓여 먹을 것이다. 나의 엄마가 바랐을지도 모르는 탕국 끓이기를 올해 내가 이곳에서 대신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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