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생긴 시점은 타이밍이 참으로 묘했다. 이때의 나는 나의 결혼생활엔 아이는 없는 것이라 생각하고 남편과 강아지와 행복하게 잘 살아보자 하고 계획하던 때였다. 우리는 결혼 전부터 함께 살던 사이였고 결혼을 하고 캐나다에 오면서 남편은 아이를 원했다. 반면 나는 뼛속까지 비혼 주의에 딩크족이었지만 남편과 함께 하면서 아이를 낳아도 되겠다는 막연한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그때부터 남편과 나는 꽤 오랫동안 피임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나는 결혼과 출산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사람이었다. 엄마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던 어린 나는 결혼은 한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불행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해왔고, 많지는 않지만 몇 번의 연애경험과, 취업을 하면서 나의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와중에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남편은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정 반대의 사람이었다. 외모도 생각도 행동도 모든 것이 나에게 신선했다. 그간의 나의 연애는 매우 힘들고 정서적으로 불안한 것이었다면 남편과의 연애에서 나는 정서적인 안정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배려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남편과 만나면서 결혼이 어쩌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겠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30년을 넘게 결혼과 출산에 불신을 갖고 살던 내가 겨우 한걸음 다르게 생각했을 뿐 확고하던 내 생각이 백 퍼센트 바뀐 건 아니었다. 비유를 하자면 매번 악역만 하는 연예인이 예능에 나와서 빵빵 터트리는 걸 보며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나와 남편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한잔 시켜놓고 내 인생이 바뀌게 된 결정적인 대화를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남편이 들어오는 건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심각하게 대화를 한건 아니었다. 그냥 간단했다. "같이 살아보는 것이 어떨까?" 라며 물어보는 남편의 제안에 나는 동의했고 그렇게 우리는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남동생과 자취를 한 적이 있다. 당시 남동생은 서울에서 공무원 준비를 해야겠다며 부모님을 설득했고 나와 함께 살 것을 조건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일을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부모님 입장에서는 딸이 타지에서 혼자 지내는 것보다 동생이 같이 지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며 같이 살 것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렇게 동생과 나는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부모님의 손길에 길들여져 있는 동생과, 20살 이후부터 꽤 오랜 시간 혼자 살던 나의 생활 습관은 너무나 달랐고 내가 마냥 착한 누나가 아니었기에 얼굴만 부딪히면 으르렁대기 일수였다. 엄마는 나에게 동생이 못 챙겨 먹을 것이라며 밥도 해주고 청소도 해주라고 자주 연락을 하셨다. 하지만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내가 왜?'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엄마에게는 걱정하지 말라는 입바른 소리를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그랬던 건 아니다. 같이 지내는 초반엔 빨래도 도와주고 청소도 내가 먼저 하면서 엄마의 기대에 부응했지만 고마움을 모르는 동생을 보면서 나도 조금씩 손을 놓게 되었고 어느샌가 동생 몫의 집안일은 절대 해주지 않았다. 내 남동생은 성인이고 손도 있고 발도 있고 본인이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는 나이다. 빨래도 손이 하는 게 아니라 세탁기가 해주면 꺼내서 널기만 하면 되는 것을 도대체 내가 왜, 일하느라 정신없어 죽겠는 나에게 하라고 하는 건지 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다. 내가 남동생과 1년 정도 같이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두 가지가 있는데 남동생은 해주지 않으면 본인이 찾아서 스스로 한다는 것 그리고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내가 일체 해주지 않으니 어느 순간부터 동생은 냉장고에 먹을 게 있으면 스스로 알아서 찾아먹고 빨래도 본인이 알아서 했다. 물론 마지막까지 청소는 더럽게 안 했지만. 망할 놈.
이런 경험이 있는 나에게 남자 친구, 지금의 남편, 과의 동거는 굉장히 큰 선택이었다. 같이 살기로 마음먹은 이상 최선을 다해서 이 사람을 더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남편은 살고 있던 집 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내가 살던 자취방으로 왔다. 나는 동생이 쓰던 남은 방을 창고처럼 쓰고 있었는데 그곳을 정리해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인 당시 남자 친구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얼마나 동생과 다른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남동생과 자취를 하던 무렵, 남편은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처음 그의 자취방에 놀러 갔을 때 상당히 깨끗한 집을 보며 여동생이 깔끔한 건가 싶었는데 웬걸 남편이 청소를 담당해서 하고 있었다. 처음엔 의심했었는데 방문할수록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머리카락 한올 없는이 남자의 방을 보면서 이런 사람과 결혼한다면 내가 동생과 지낼 때 생기던 문제들은 없겠구나 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평소 정리하는 습관이나 행동을 보면서 나의 그런 생각은 점점 더 확신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함께 지내보니동생과 살던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백 퍼센트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사소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렸다. 살면서 우리는 누군가가 해주겠지가 아니라 내가 먼저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청소와 빨래 설거지 등 조금 귀찮은 것들을 함께 하였다. 실제로도 결혼 후 내가 청소기를 돌려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이다. 그렇게 나는 사소한 것들에 대한 배려를 해주는 나의 남자 친구에게 마음을 열었고 1년 가까이 같이 생활하면서 결혼에 대한 확신을 굳혔다. 참고로 나는 아기를 낳고 지내는 지금까지도 집안일과 같은 사소한 것들 때문에 속상한 적이 거의 없다.
같이 지내던 집 계약이 만료되면서 우리는 결혼을 결심하였다. 중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누구보다 나를 이해해주고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1년 가까이 살면서 내 동생과 다른 사람, 아빠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캐나다로 이민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결혼과 아기를 낳는 것은 결코 같은 선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이 나의 결혼에 대한 생각을 바꿔준 건 맞지만 아기를 낳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주장에 대해 고집을 부렸고 어느 날은 운전 중인 남편과 아이를 낳느냐 마느냐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남편은 한국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캐나다에서 과한 경쟁 없이 아이가 행복하게 클 수 있는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아이를 낳는 것이 무슨 문제냐는 입장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고 연고도 없는 해외에서 아기를 낳아 살아가는 것 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캐나다에서 지내고 있었던 우리는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고 남편은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이 불안했다. 내가 학교를 가지 못한다면? 영주권을 따지 못한다면? 남편이 갑자기 회사에서 잘린다면? 수만 가지 불안을 가지고 매일을 지내고 있었던 터라 남편의 아기 이야기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접점 없는 대화를 이어가며 서로를 설득하길 2년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학교 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하였고 운이 좋게도 남편의 회사를 통해 진행한 영주권은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을 때였다. 같이 산지도 어느덧 3년 차가 넘어가고 있었고 남편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주기 시작했다. 하루는 나에게 아기가 없어도 우리 둘이 행복하면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을 보며 이 사람이라면 아기를 낳아도 행복할 수 있을것 같았다. 이상했다. 그렇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그 순간 생각이 바뀌다니. 지금껏 내가 외쳐온 모든 세계가 무너지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