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으로 이사하자마자 ‘이건 운명인가?’ 싶은 사람과 닿았다. 인테리어 공사를 진행하던 중 옆 라인에 붙어 있는 옆집에서 우리 집 공사로 인해 벽지가 떨어졌다는 연락을 해왔다. 인테리어 실장님이 방문하여 해결해 주었고 그때 같이 갔던 남편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었다. “옆 라인 옆집에 우리 첫째랑 비슷해 보이는 아기가 있더라” 이사하자마자 7개월 된 우리 아이를 안고 옆 라인으로 건너갔다. “딩동” 아기를 안은 채 젊은 여자 한 명이 나왔고 그 뒤에 남자 한 명이 얼굴을 내밀었다. 남편과 나는 양해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작은 케이크를 전달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그 집 아이와 우리 집 아이는 1개월 차이가 난다는 것. 아이 아빠 고향이 우리 고향과 같은 대구라는 것이었다. 두 가지 사실만으로 빠르게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파트도 같은데 문화센터도 같이 다니고 장 보러 같이 가고 해요!” 빨리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점심 초대를 하기도 했다.
그녀는 울산 출신이지만 울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문화센터나 아이들 놀기 좋은 키즈카페, 아이 용품 저렴하게 파는 곳 등 내가 정보를 제공했고 그녀는 그 정보를 취하기만 했다. “장난감을 천 원에 빌릴 수 있는 육아지원센터가 있대요!” 우리는 한 차를 타고 함께 갔다. 지역 주민만을 위한 곳이라 등본을 확인하던 직원이 말했다. “어머 두 분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사시네요!” 이보다 좋은 관계가 어디 있을까. “아이 간식 만들었는데 H도 좀 주세요”, “마트에서 파는 어묵 양이 많아서 어묵볶음이 많아졌는데 좀 드셔보세요!.” 뭘 그리도 주고 싶었는지 반찬이 내 마음 인양 이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다 퍼주었다.
“우리 H 돌잔치에 올래? 최소인원이 안 채워질 것 같아서” 1개월 빠른 우리 아이 돌잔치 때 축하는커녕 일언반구도 없던 그녀가 최소인원이 안 찰 것 같다며 돌잔치에 초대했다. 이용당하는 기분이었지만 H를 생각하며 선물을 들고 참석했다. 초대 이유는 잊고 온 마음으로 축하했지만,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 나는 호구구나.’ 힘이 쭉 빠졌다. 인제 그만 퍼주라고 머리가 말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울산에서 운명같이 나타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연락하지 않으면 전혀 연락 없던 그녀는 애들 어린이집 보낼 시기가 되니 연락이 왔다. “어린이집 어디 보낼 거야?” 이 한마디에 늘 그랬듯 내가 아는 정보를 다 퍼줬다. 그렇게 또 날름 정보만 취해갔다. 둘째 임신 소식을 알려도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조기 진통으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는 걸 알면서도 병문안은 고사하고 연락 한 통조차 없었다. 서운했다. 아기를 힘들게 낳았다는 소식을 알면서도 연락 한 통 없었다. 옆집에 살면서 그렇게 모르는 사람인 듯 지냈다.
“너희 반 없어진다면서?”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어린이집 선생님 퇴사 건으로 우리 반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반년 만에 그녀의 연락이 왔다. 그때 확실히 알았다. 나만 친구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을. 안 그래도 화나는 상황에 그녀에게 그동안 쌓인 모든 걸 다 퍼부었다. 내가 대학병원 입원했을 때, 애 낳을 때 연락 한 통 없다가 지금 그거 궁금해서 연락한 거냐고. 항상 상냥했던 내가 화내는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친구 사귀고 싶은 게 그렇게 큰 욕심인가? 경력단절 무연고지에 사는 전업주부는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귈 수 없구나. 아니면 울산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는 건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 살기는 대학생 때도 해봤다. 그때도 힘든 점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이로 인해 맺어진 관계가 내 관계가 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힘들었다. 외향적인 내가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는 경력단절 전업주부였으니 그냥 이대로 우울하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좌절하며 무너졌다. 이렇게 마음 맞는 친구 하나 없을 힘든 상황이 펼쳐질 것을 모른 채 아이만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이사를 선택한 과거의 내가 한심스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