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 헬로키티"
하와이 한정판 헬로키티다.
하와이 햇볕이 워낙 강하다 보니 태닝 한 컨셉의 헬로키티를 출시한 것이다. 나는 헬로키티 하면 흰색 밖에 떠올릴 줄 몰랐는데. 역시, 다문화 지역인 이곳은 선입견이 없다.
내 취미는 여행이다.
입사 전 후로 여행을 꽤 다녔다. 교환학생이나 유학 등 해외 거주경험이 없을 뿐, 맛보기 형식으로 다양한 국가를 여행했다. 대학생 때는 홍콩, 마카오, 태국, 대만, 베트남(다낭), 일본을 다녀왔고, 졸업유예 후에는 고향친구와 서유럽을 3주 동안 여행했다 - 파리, 런던, 스페인, 포르투갈. 입사 후에도 상해, 일본, 싱가포르, 세부, 베트남(푸꾸옥), 이탈리아, 프라하, 크로아티아, 호주, 미국 서부, 홍콩 등 아시아/ 유럽/ 미주를 가리지 않고 동네방네 여행했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를 나름 '글로벌'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렇게도 나 자신을 몰랐다.
이번 하와이 여행은,
한 달을 해외에서 보내는 것도, 다른 누구와 방을 쉐어하는 것도, 외국인과 같이 사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다. 학생 때도 기숙사에 단 한번 살아본 적 없었고, 혼자 자취방에서 지냈다. 근데 20대 초반의 유럽소녀들과의 룸 쉐어라니. 하와이에 가기 전부터 룸 쉐어가 제일 걱정이었다. 그래도 나름 왕언니로서 애들에게 한국식 위스키를 소개해주며,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참이슬 도쿠리도 챙겨갔다. 근데 레지던스 내에서의 음주는 학원 규정 상 금지였고, 내 룸메인 Anja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안방의 프랑스 소녀 둘 중 Lulu는 조용한 편이었고, Leeloo는 솔직히 좀 미친 애 같았다. 온몸에 문신 투성이에 매일 밤 담배를 태워댔다.
하와이 첫날, Anja랑 해변에서 Chilling 하고 들어오니 안방 소녀 두 명도 귀가해 있었다.
Leeloo는 나를 보자마자 한국인이냐며, 자기가 맞췄다고 엄청 신나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린 거의 대화가 없었다. 학원 스케줄이 달라 방에 있는 시간이 겹칠 일이 없었고, 그마저도 안방 애들은 문을 닫고 지내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혹시나 나의 짐에 손을 대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매일 밤 베개 밑에 내 여권을 두고 잤다. 현금과 신용카드는 트렁크에 잠가둔 채로.
Leeloo는 가끔 취한 건지, 약을 한 건지, 아니면 원래 하이 텐션인 건지, 나와 Anja가 있는 거실 쪽으로 나와 한 번씩 말을 걸곤 했다. 늘 우리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만 그녀들의 문신과 담배 냄새에 쫄았지, 같이 지내고 보니 식비를 아끼느라 늘 요리해 먹고 학원에 도시락도 싸다니고 나보다 나은 친구들 같았다.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다들 오전 일찍 나가고 Leeloo와 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키친 서랍에 있는 짜파게티를 어디서 샀냐고 물었고, 그녀는 Target에서 샀다며 자기 최애라고 답했다. 나는 농심 짜파게티를 먹는 유럽소녀가 너무 신기해서 질문 폭격을 해댔고, 알고 보니 그녀의 언니 남자친구가 한국인이라 가끔 그 남친의 어머니가 불고기도 해주고 한국음식을 많이 해주신다고 했다.
Lulu 와는 처음 이틀간 학원에서 같은 반이었는데, 볼수록 조용하고 모범생 스타일인 것 같았다. 우리 레지던스 방에서는 제일 막내인데 뭔가 장녀 스멜 나는 느낌? 요리도 잘해서 가끔씩 Leeloo 와 같이 저녁을 해 먹는 것 같았다. 집에서도 조용히 책을 보거나 노래를 듣는지 한 번 안방에 들어가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Lulumahu Falls 트래킹을 다녀와서 발과 신발이 몽땅 진흙 투성이가 된 적이 있다. 레지던스 화장실은 여자 4명이 쉐어하다 보니 머리카락 때문에 배수구가 자주 막혔는데, 나의 진흙 덩어리가 더해져 화장실 배수구가 완전히 막혀 버렸다. 나는 늘 깔끔한 편이지만 딱 2가지에 약했는데 바로 싱크대랑 화장실 청소. 나는 화장실 배수구를 어찌 청소해야 될지 몰라 걍 모르쇠로 지냈다. 어떻게 되겠지.
그 다음날, Lulu 에게서 DM 이 왔다. 나는 평소 조용하던 룸메에게 연락을 받아 혹시 나랑 놀자는 건가 하며 기쁜 마음에 인스타를 켰는데 웬걸.. 나 때문에 화장실 배수구가 막혀 청소는 해놨는데 앞으로 주의해 달라는 경고장이었다.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 레지던스 왕언니.. 그냥 왕언니도 아니고 거의 이모급 나 때문에 어질러진 화장실을 막내가 다 정리하다니. 마치 9살 어린 Lulu가 언니 같고 내가 철부지 막내 같았다. Chat GPT 번역기를 돌려 최대한 공손하게 사죄하고, 이후 화장실을 쓸 때마다 머리카락이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지 않게 최선을 다해 조심히 샤워했다. 불편하긴 했지만 그게 맞지. 나만 쓰는 공간이 아닌데.
그렇게 하와이에서의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점차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문신이 많건, 담배를 피우건, 나이가 적건/많건, 유럽사람이건, 남미사람이건 다 똑같은 사람이고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 외국에선 차라리 같은 한국인을 더 조심하랬다고 나쁜 외국인은 없었다. 적어도 하와이에선. 어리니까, 문신이 많으니까, 외국인이니까, -니까, -니까를 붙이며 알아보기도 전에 선을 그은 것은 항상 나였다. 외국인들은 첫 질문을 "What's your name?" 이라고 하는데, 나는 항상 "Where are you from?" 이라고 했다. 어디서 왔는지 그깟게 뭣이 중헌디.
7년을 글로벌영업팀에서 근무하고, 15개국이 넘는 나라를 여행했지만 내 글로벌 마인드는 Zero 였다. 근데 하와이에서 배웠다. 우리는 다 똑같은 '친구' 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