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따님의 로망이 유니버설 스튜디오였다면 아빠의 로망은 여유로운 교토 산책이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교토 료칸에서 숙박도 하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었지만 당일치기로 다녀오면서 편하게 즐기려면 목적지를 한 곳으로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예전부터 사진으로 보며 꼭 가보고 싶었던 기요미즈데라(청수사)와 니넨자카, 산넨자카 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우메다 역에서 교토 역까지는 전철로 대략 30분 정도 걸렸다. 이번 여행은 현장학습의 의미도 있고 하니 아이에게 교육적인 뭔가를 남겨주고 싶어서 교토와 오사카 역사에 대해 전국시대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니 등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교토와 도쿄도 헷갈려하는 아이에게 어떤 교육이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유니버설과 해리포터가 전부인 여행으로 남겨주고 싶진 않아서였다. 역시나 아이는 지겨워했다.
교토 역은 층고가 높고 엄청 멋스러웠다. 날씨도 좋고 모든 게 완벽했다. 날씨가 화창한 거까지는 좋았는데 긴팔을 입고 나온 아이가 더워서 힘들어하기 시작했다. 빨리 반팔을 구입해야 했다. 주변에 유니클로를 검색하니 다행히 역 안에 작은 매장이 하나 있었다. 반팔티를 구입하여 갈아입고 나니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렴한 비용으로 만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유니클로에게 고마웠다.
교토역에서 기요미즈데라 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이동 중에 느낀 교토의 인상은 지나치게 차분하다 못해 생기가 없게 느껴졌다. 아마도 날이 너무 더워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기요미즈데라는 산 위에 위치했지만 그다지 높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올라가는 길에 고풍스러운 건물들도 잘 배치되어 있고 여러모로 볼거리도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한적하니 산책하기 딱 좋다라고 생각하고 올라가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구에 다다르니 단체관광객들로 붐볐다. 한국 수학여행 시즌의 경주 불국사가 연상되는 풍경이었다.
기요미즈데라(청수사)는 말 그대로 물이 맑은 절이라는 뜻이다. 778년에 만들어졌고 목조 건물이다 보니 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다 현재 건물 대부분은 1633년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서 전면에 위치한 기요미즈 무대 위에 올라가니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너무 좋았다. ‘무대’ 그 자체도 인상적이었다. 13미터 높이의 건물을 못 하나 없이 나무로만 뼈대를 만들어서 올렸는데 건축공학적으로도, 디자인적으로도 훌륭해 보였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니 오토와 폭포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폭포라고 칭하기엔 좀 민망한 사이즈의 물줄기가 세 갈래로 흐르고 있었는데 각각 건강, 학업, 연애를 상징하고 물을 마시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줄을 서고 있었다.
여행할 때 사람들이 몰리는 곳은 피하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따님과의 호흡이 잘 맞아 너무 좋았다. 꼭 마시고 싶으니 줄을 서자고 떼를 쓰면 참으로 난감할 텐데 말이다. 같은 DNA라는 건 놀랍고도 오묘하며 이럴 때 큰 도움이 된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조금 내려오니 팥빙수를 파는 매점이 보였다. 공기 좋은 산 중턱에서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즐기는 팥빙수는 그야말로 별미였다.
산넨자카를 거쳐 니넨자카로 내려가는 길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길 자체도, 건물들 사이로 멀리 보이는 교토 시내 풍경도, 좌우로 늘어선 멋진 건물들도 모두 흠잡을 데가 없었다. PORTER, 스타벅스, 공차 등 유명한 브랜드의 현대적인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운 건물 안에 녹아들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날이 더워 그새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스타벅스가 몹시도 땡겼지만 역시나 사람이 너무 많았다. 마침 공차 덕후인 따님이 일본에서만 판매한다는 우지 말차 밀크티를 먹고 싶다고 하여 그리로 발걸음을 돌렸다. 공차 매장은 작지만 중정도 있고 꽤 운치 있었다.
이대로 교토를 떠나기엔 사진에서만 보던 멋진 야경이 궁금했지만 밤늦은 열차를 타고 싶진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밤은 우리가 사랑하는 우메다 역 근처에서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사카로 돌아가는 열차 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나 홀로 여행을 즐기는 편이지만 항상 여행의 마지막 날 해질 무렵엔 묘하게 쓸쓸한 느낌이 나곤 했다. 이번 여행은 딸아이와 함께라서 그런지 그런 센티함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까지 즐거울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여행 마지막 날 저녁은 항상 아쉽다. 아이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오버는 금물이다. 귀국 후 바로 이어지는 일상생활에 무리가 오기 때문이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숙소 주변이니 나중에 가야지라고 방문을 미뤘던 한큐 백화점 본점을 둘러보기로 했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 인테리어도 구경하고 백화점 식당가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마침 행사 중인 브리티시페어 2024 행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의 엑기스만 모아놓은 거처럼 여러모로 잘 꾸며져 있어서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는데 아이가 지루해했다. 해리포터 덕후면 영국도 더 파야하는 거 아니냐며 꼬셔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아이의 즐거움이 목적이었던 여행이니 마지막 히든카드를 빼어 들었다. 바로 요도바시 카메라 가챠샵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규모가 클 줄은 몰랐는데 이게 바로 진정한 가챠샵이구나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사이즈였고
아이는 신이 나서 가챠를 뽑기 시작했다. "원하는 가챠 하나를 뽑으면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저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 신나게 즐기렴. 나는 너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즐길 테니.."라는 생각에 뿌듯해졌다.
교토도, 기요미즈데라도, 서울에서 보기 힘든 파란 하늘도 모두 좋았겠지만 따님은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던 거 같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