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더 매력적인 한라산
이번 제주 힐링 여행의 마지막 장은 '한라산 백록담에서 아침 식사하고 오기' 였다. 얼마 전 '소화가 잘 안되네' 라는 글을 썼듯, 하루하루 노화가 진행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조급함이 본 플랜에 제법 큰 동력이었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한라산 정상을 찍어봐야지 ! 당찬 마음가짐과 달리, 막상 등반 준비에는 소홀했다. 숙소와 교통편만 예약해두고 디테일한 여행 플랜은 각 당일 전날 밤에 짜버릇 하다보니, 결국 전날 이마트 서귀포 점에서 부랴부랴 이런 저런 준비물을 구비했다. 구비하는 과정에서도 아차 싶은 것들이 있었고, 실제 등반을 하는 9시간 30분 이라는 기나긴 여정 속에서도, 미처 준비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에 대한 아쉬움이 꽤나 있었다. 혹여나 한라산 등반을 준비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고자 - 몇 가지 재미있는 사실들을 나열해보고자 한다.
동쪽에서 진입하는 성판악 입구와, 북쪽에서 진입하는 관음사 입구, 총 2가지 코스만이 백록담으로 이어진다. 그러다보니 입산x하산의 경우의 수가 총 4가지인 셈인데 초심자에게는 성판악으로 올라가서 백록담을 보고 관음사로 내려오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성판악 코스가 비교적 완만하고 긴 편이라면 관음사 코스는 가파르고 조금 더 짧다. 실제로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면서, 이 코스를 걸어 올라갈 생각을 하니 아찔하더이다. 별개로 동쪽에서 입산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해가 일찍 뜨기 때문에 금새 밝아져서 좋고, 역광이 아니니 눈부시지 않고 좋다. 북쪽으로 하산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 하산 할 쯤이면 해가 남쪽으로 떠있을터이니 북으로 향하며 하산하는 것이 좋다.
숲 속에서는 해가 유독 일찍 진다는 것 (일찍 어두워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후 4시에는 하산이 되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 아침 7-8시에는 등산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실제로 특정 지점을 기준으로 입산 제한 시간도 정해져있다. 일몰 시간에 따라 달라지겠으나, 11월 12일 기준 성판악 코스에서는 진달래 대피소를 오후 12시 이전에는 통과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상 진입을 불허하였다. 마치 명절의 고속도로와 같이 1시간을 늦게 출발하면 도착 시간은 2시간 이상 늦어지게 된다. 특정 시간대 (7~8시)에 사람들이 가장 바글거리기 때문에, 6시~7시에 출발하는 것을 권장한다. 등하산 8~10시간 사이에 30분 ~60분 정도는 백록담 비석과 사진 찍기 위해 대기해야 되는 시간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라산 정상에서도 하산을 시작해야만 하는 시각이 정해져 있다. 백록담 비석과 사진을 찍고 싶다면 가급적 아침 6시 대에 출발 해야 할 것이다.
여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들이 그러하듯, 한라산도 산 중에 쓰레기 통이 없다. 8~10 시간을 산행하는 입장에서 수많은 물 패트와 음식물 쓰레기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텐데, 그것들을 스스로 잘 챙겨 내려갈 수 있게끔 준비를 해야 한다. 운좋게 바나나를 넣어간 봉투가 있어 그것을 쓰레기 봉투 삼았는데, 다음에는 아예 그 봉투를 담을 가방을 작게 나마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화장실 개수가 적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블로그 포스팅 두어개만 살펴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닥쳐서 알게 된 것은 세면대가 없다는 사실. 해당 내용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화장실 벽면에 서술되어 있었다. 그 높은 곳까지 물을 끌어다가 대기가 어렵기 때문에, 자체 정화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의 소변을 재활용하여 변기 물을 마련하는 구조였다. 그렇다보니 정확하게 깨끗한 물을 마련하지는 못하는 것. 이를 '무방류 순환수세식' 이라고 하더이다. 물을 넉넉히 챙겨갔던 나는 먹는 물로 손을 씻곤 했다만, 물티슈를 챙겨갔으면 더 용이했을 것 같다.
한라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한라산 등정 인증서를 발급해준다. 별거 아닐 수 있지만 개인적인 뿌듯함을 tangible 한 무언가로 남겨두는 것이 제법 의미가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발급받는다. 절차는 간단한데, 1) 본인 인증을 하고 2) 한라산 정상에서 찍은 본인 셀카 사진을 업로드 하면 3) 승인 프로세스를 거친 이후에 4) 인증 번호를 받게 되고, 5) 이를 하산 이후 주차장 근처의 키오스크에 기입하여 프린트하면 끝이다. 관련하여 대부분의 블로그 포스팅에서 알려주는 팁은, - 승인 프로세스 시간이 소요되니, '하산 중간에 미리 발급 요청을 해둘 것'인데 최근의 실상은 조금 달라서 아래와 같이 재정리 해본다.
A. 본인 인증을 할 때, 네이버 인증, 카카오 인증이 있는데 - 카카오 인증을 하면 카카오 톡에 등록된 본인 이름으로 증명서가 나온다. 카카오톡에 본인 이름을 닉네임으로 해두었다면 닉네임으로 증명서가 나오는 것. 이 부분 유념하면 좋겠다. (나도 영문 이름이 함께 프린트 되어버렸다.)
B. 한라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 하기 이전에, GPS 위치 정보 습득에 대한 권한 요청을 하는 팝업이 뜬다. 나는 위치정보 권한을 부여해주고 사진을 업로드하였는데 - 그 이후 승인 프로세스는 거의 없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바로) 인증 번호가 발급되었다. 실제 나의 사진이 한라산 정상 근처인지 식별하기에 그 찰라는 너무도 짧았을거라, 짐작컨대 GPS 위치 정보를 토대로 내가 정상에 올랐음을 식별한듯 싶었다. 하여 혹여나 깜빡하고 셀카를 찍지 못한 사람은 (그럴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포기말고 일단 정상 근처에서 위치정보를 부여하고 아무 풍경사진이나 올려보자. 밑져야 본전일테니 !
C. 키오스크에서 프린트를 하면, 그 종이를 구기지 않고 넣어 갈 수 있는 플라스틱 화일을 함께 제공해준다. 우리의 세금이 아주 잘 쓰이는 몇 안되는 사례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끝으로 11월 12일 한라산은 정말 따뜻했다. 제주 시내의 기온과 백록담에서의 기온은 천지 차이라고 하더니만, 별반 차이가 없었다. 제주도는 전반적으로 기후가 온화하지만 높은 건물이 거의 전무하다보니 바람의 세기가 거세고, 이로 인한 체감 온도는 많이 낮은 편이다. 시내에서 이미 조금의 추위를 겪은터라 잔뜩 겁을 먹고 이마트 서귀포점에서 방한 용품들 - 넥워머, 장갑, 히트텍 등을 구비하고, 운동용 이너웨어 + 맨투맨, 패딩 조끼에 후리스, 비니까지 쓴 채 등산을 시작했다. 30분도 되지 않아 후리스와 비니를 벗었고, 넥워머와 장갑도 집어넣었다. 패딩 조끼마저도 넣고 싶었으나 더 이상 백팩에 공간이 없었다. '카더라'를 너무 믿지 말고 본인이 추위에 얼마나 강한지 주관에 따라 의사결정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나처럼 아무 준비 않고 있다가 전날에 닥쳐서 준비를 하다보면 나의 주관을 살펴볼 여력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