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실은 너무 분명해서 잔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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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나의 죽음이 아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죽는다면 어떡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남겨진 자가 견뎌야 하는 먹먹함과 가슴 아픔, 허전함, 대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이 두려움은 너무 커서 종종 나를 무너뜨렸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을 상상이라도 하면,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울음을 터뜨렸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그럴 일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는 간절한 자의 절박한 외침.
두려워서 죽음에 관한 책들을 찾아 읽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보낸 이의 책들을 읽었다.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으로 다른 이의 죽음을 소비했다. 활자 위에 적혀진 슬픔은 실제 그들의 슬픔보다 옅어 있었다. 몇 문장 위엔 밑줄을 그었다. 어떠한 죄책감 없이. 살아 있는 자의 오만으로. 사회적인 책임이 있는 죽음일수록 오래 읽을 수가 없었다. 가슴 아팠기에 붙들고 있는 게 어려웠다. 왜. 어째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묻게 되는 죽음에는 절로 고개를 숙였다. 청년들의 고독사와 노동 현장에서의 죽음. 세월호가 그러했다.
지난겨울의 끝자락에서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봤다. <애프터 라이프 앵그리맨>.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는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아내를 찍어둔 영상을 본다. 영상에서 그들은 행복하다. 남자는 장난치고, 아내는 유쾌하게 웃는다. 그러나 남자는 금방 알아버린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시간이라는 것을. 앞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고, 제멋대로 행동한다. 정말 그는 죽고 싶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괴로우니까. 드라마를 보면서 몇 번이나 울었다. 사랑하는 이와 다시 볼 수 없는 이별은 너무도 큰 상실이기에.
어떤 사실은 너무 분명해서 잔인하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사실. 그게 우리의 인생이라는 사실. 그러니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두려움을 영영 피할 수가 없다.
이모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장에 갔다. 가까운 이의 죽음이었기에 마지막을 함께하고 싶었다. 향불을 올리고,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고, 슬퍼하고, 나의 후회를 곱씹었다. 생전에 함께 했던 추억을 나누었다. 예배를 드렸고, 종교가 없지만 기도했다. 좋은 곳으로 가게 해주세요. 천국이 있다면, 그곳으로 꼭. 기도는 간절한 자의 절박한 외침. 처음 만난 이의 손을 잡았다. 장례식장은 안쓰러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사랑했고 사랑을 받아서 안쓰러운 사람들. 먼저 간 이의 죽음을 안쓰러워하고, 옆에 있는 사람의 슬픔을 안쓰러워하고. 살아 있어서 안쓰럽고, 죽음을 생각해 본 적 있기에 안쓰러운 사람들.
흔들리는 촛불을 오래오래 바라보았고, 장례식장 주변을 걸었다. 밤에는 집에 들어와 잠을 자려고 노력했다. 첫날은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둘째 날 밤에는 자기 전에 유튜브에서 음악을 들었다. 우아한 유령. 이 음악을 들으며 잠들 수 있었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밝은 모습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는 모습이 음악에 녹아있었다.
죽음 앞에서는 우리 모두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종교를 믿고, 건강을 챙기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다 한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선 무너질 수밖에. 사랑했다는 흔적이니까. 살아 있는 동안 함께 했다는 증거이니까.
며칠간 나의 모든 일상이 멈췄다. 같은 옷을 입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두려워했던 내가 닥친 현실 앞에서는 하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애도하는 일이 전부였다.
이 세상에 살았던 한 사람은 이제는 없다. 그가 나눠주었던 친절과 사랑만이 남아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완연한 봄이었다. 어디를 가나 꽃이 보였고, 연둣빛의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함께 보면 좋은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co2EmLXjj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