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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퇴사 그 이후

by 서로를 우연히

첫 직장을 퇴사한 나는 병원을 다니는 돌멩이가 되었다.


그간 미뤄둔 잠을 청하듯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자는 데에

사용했고, 깨어있는 시간은 전 직장에서 얻은 허리디스크 치료와 자그마한 나의 원룸에 콕 박혀있는 일에 사용했다. 놀랍도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꼼짝없이 누워있을 수 있음이,

지옥 같은 그곳에 출근도장을 찍지 않아도 되는 일상이 너무나 감사했다. 꽤 오랜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고 나서야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청소였다.

가뜩이나 좁은 나의 방은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상태였고,

여기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잘 정돈된 방에서 정성껏 식사를 준비해 나에게 대접하는 퇴사 후 로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참 다양한 음식을 해 먹기 시작했다.


나를 살뜰히 챙기기 위해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여유 있는 식사를 즐기거나, 계절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식후 커피를 내리는 일은 아주 재미있었다.


스타트를 끊고 나니 잊고 살았던 나의 취미들이 하나둘씩 복기되었고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자아의 조각들이 돌아왔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것은 산책길에 마주하는 강아지나 달콤한 아이스크림, 아침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새의 지저귐 같은 사소한 것이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들은 나의 생기를 되찾아줬고

덕분에 디스크 치료도 잘 마무리되었다.


붐비는 대중교통을 타면 호흡이 가빠지거나, 길에서 전 팀장을 닮은 사람과 마주칠 때면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증상은 여전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그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았다.


잊고 싶다고 덮어두지 않고, 내가 가진 나쁜 감정이 바닥날 때까지 충분히 미워하는 기간을 가졌기에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토록 순도 높은 분노를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다.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못한 나 자신도 증오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내가 포함되어서일까, 마치 영원할 것처럼 타오르던 노여움의 끝에 남은 것은 연민이었다.

각자 너무 힘든 나머지 잘 지낼 수 없던 우리가 안타까웠다. 아마 척박한 환경이 아닌, 숨 쉴만한 곳에서 만났다면 서로가 조금 덜 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멀리 달아난 후 돌아본 그곳은 전쟁터였다.

선배라는 사람들 역시 그곳에서 치열하게 살아남아야 했으니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하는 신입을 나서서 챙길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 오히려 나라는 후배에게는 솔직하게 본인의 힘듦을 내색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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