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정 Jun 17. 2020

체력은 국력, 그리고 공연기획자의 필수 역량

절대 아프지 말 것을 명하노라!


얼마 전 진로 멘토링 전문 회사 달꿈이 특별히 개발한 HEXA CT 6대 핵심 역량 검사에 참여하고, 분석 결과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공연기획자에게는 인지적 처리 역량, 공동체 역량, 자기 관리 역량이 요구된다고 한다. 나는 1순위로 자기 관리, 2순위로 인지적 처리 역량이 탁월하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그렇게 보면 직업이 요구하는 역량과 거의 엇비슷하게 나왔다고 할 수 있겠다.


가끔 공연기획자에게 필요한 역량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써보도록 하겠다. 오늘은 공연기획자가 갖춰야 할 여러 역량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자기 관리'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모름지기 '자기 관리'라는 말 안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업무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내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력과 체력을 잘 다스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건강을 잃으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많지 않다. 특히나 고강도의 노동과 집중력을 요구하는 공연기획의 세계에서 체력을 잃으면, 긴 레이스의 끝까지 도달할 수 없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영혼을 모조리 갈아 넣어야 하는 페스티벌


한 편의 공연을 한 공연장에서 올리는 기획공연과 페스티벌은 여러모로 차원이 다르다. 페스티벌은 보통 다양한 작품이 여러 곳의 공연장소에서 올라가게 되기에 회의와 점검을 위한 이동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극장 간의 거리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이동이 한결 수월하지만, 극장 간 거리가 현격하게 멀 경우에는 이동만으로도 지치기 십상이다.

또 정식 공연 프로그램 이외에도 다양한 이벤트성 프로그램(Ex. 개막식, 폐막식, 관객과의 대화, 관객 참여 이벤트, 워크숍, 포럼, 라운드테이블)이 진행되기 때문에 챙겨야 할 일의 가짓수도 배가 된다. 그만큼 축제가 임박한 2~3개월은 거의 영혼을 다 갈아 넣어야 한다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장에서 아프지 말 것!


에피소드 1. 처음 페스티벌에서 일했을 때에는 체력관리고 뭐고, 체력 자체가 업무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우선 집에서 사무실까지 출퇴근 시간이 왕복 4시간이 넘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근무 초기부터 극심한 피로가 따라다녔던 것이 패인이었다. 또 페스티벌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스트레스로 인한 두통과 복통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지금까지도 손에 꼽는 최악의 순간은 영국에서 온 공연팀이 무대 셋업 하는 동안에 숙소에 누워있어야만 했던 때다. 업무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나를 걱정해 축제 팀원 중 한 명이 사다 준 샌드위치를 급하게 먹고 난 뒤에 체기가 올라왔고, 심지어는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거기다 심한 두통까지 겹쳐 도저히 공연장에 서있을 기운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공연팀은 세트를 국내에서 제작해 주기로 했기에 유독 체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렇게 아픈 몸으로 현장에서 버텨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무리하다가 쓰러지느니 잠시라도 제대로 쉬었다 오라!"라는 스태프들의 배려가 있었기에 잠시나마 숙소로 돌아가 누워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편할 리가 만무했다. 약을 먹고 나아진 몸으로 다시 무대로 황급히 돌아와 밀린 업무를 해결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때 영국 팀 멤버 중의 한 명도 심하게 두통을 호소해서 급하게 달려가 약을 사다 준 기억이 난다. 다행히 약이 잘 들어 금방 두통이 가라앉았다며 안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우리는 아파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당시의 일을 겪으며 체력관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적절한 식사 및 수면시간을 확보하지 않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아서였다. 또 스트레스와 조급증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 퇴근 후에는 되도록 일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축제는 긴 레이스인데다, 결승선을 앞두고서는 내가 가진 에너지의 120% 이상을 쏟아부어야 하기에 적절하게 체력을 안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잠들 수 없는 축제 준비의 기간들


EDM 페스티벌은 내가 일했던 페스티벌 중 규모가 가장 컸다. 화려한 무대 세트와 각종 음향, 조명 장비들이 들어올 때마다 그 스케일에 여러 번 놀랐다. 축제가 임박해서는 공연장 안의 사무공간으로 PC와 각종 업무 관련 자료들을 옮겨 그곳에서 근무를 시작한다.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점검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아예 현장의 최전선에서 근무를 하는 셈인데, 그만큼 귀가 시간이 늦어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 축제에서 레드불이 협찬사로 들어왔는데 레드불 측에서 그 사무공간 안에 따로 냉장고를 설치해 주고, 이렇게 레드불을 가득 채워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게 잠들면, 직원 중 누구 한 명이 나를 깨우며 레드불을 건네곤 했다. 축제 기간 동안 피로와 졸음을 감당하기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면, 누구랄 것도 없이 레드불을 마시면서 버티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레드불이 떨어질세라 냉장고에 꽉 채워준 담당 직원이 누구인지 모르겠으나, 정말 대단했다. 내 기억에 레드불이 떨어진 것은 거의 본 기억이 없다. 미지근하냐, 차갑냐, 정말 차갑냐.. 온도의 차이는 존재했으나, 적어도 레드불은 항상 냉장고 안을 지키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때마다 꺼내 마셨던 레드불



축제 이전에 아무리 잘 자고, 잘 먹었다고 할지라도 축제가 임박해올수록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막상 축제가 시작되면, 무대와 부스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느라 물 한 잔 마시기도 힘들 때가 많다. 특히 이렇게 정해진 좌석이 없이 스탠딩으로 공연이 펼쳐지는, 주류를 판매하는 페스티벌의 경우에는 여러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에 안전사고를 대비하느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버티는 법을 체득하기까지


나는 여러 축제를 많이 거쳤는데, 처음 축제를 일할 때 호되게 아팠던 이후로는 크게 아팠던 기억이 없고, 코피 한 번 흘렸던 기억이 없다. 오히려 더 힘들고 고된 시기가 닥칠 때마다 수척해지기는커녕, 체중이 더 늘어난 적도 있었다. 몸에 면역력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적응력이 향상됐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몸이 버티는 법을 체득하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공연계에서 오래 일하면서 여러 기획자들과 이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기획자들이 내 의견에 동의했다. 축제 준비 기간이나 진행 기간 동안에는 끄떡없다가 축제가 끝나고 나서 한숨 돌릴 때 갑자기 엄청나게 아파지는 현상 말이다.


많은 야근과 스트레스로 인해 분명 몸의 어디가 고장 났을 법한데 대부분의 기획자들은 아마도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해외 투어 때도 체력관리가 필수!


해외 투어 때는 시차와 기후의 차이 등등으로 예상치 못하게 컨디션 난조를 겪기 쉽다. 특히 항공료를 줄이기 위해 여러 번 경유하는 일정의 비행기를 타거나, 이른 시각에 출발에 늦은 시각에 도착하는 스케줄로 이동하게 될 때에는 피로감을 호소하기 쉽다. 기획자는 공항에서 탑승 수속이나 짐 관련해서 챙겨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나는 공항에서 멀미약을 구매해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반드시 섭취하고 최대한 푹 자려고 했다. 그래야 현지에 도착해서부터 비몽사몽 하지 않고 업무를 처리해나갈 수 있었다. 현지에 도착해서는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잠드는 습관을 들여서 스케줄 관리에 무리가 없도록 했다. 기획자가 아프게 되면, 다른 팀 멤버들이 정해진 일정을 소화해내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배우고,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관리할 것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역시도 아직도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우고 있다. 다만 내 판단력의 미스와 관리의 실패로 인해 축제 프로그램에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해 같은 실수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내가 취약한 부분을 파악하고, 그것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인 것 같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체하는 일이 잦아서 최대한 찬 것들은 먹지 않으려고 하고, 또 식사 시간에는 소화가 잘 되는 음식 위주로 먹으려고 했다. 또 축제 기간에는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푹 자기 위해서 차를 마시거나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서 잠들려고 했다.


원래 음악을 틀고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축제 기간 중에는 가끔 직원들의 신청곡을 틀어주고 기분 전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나의 신청곡은 언제나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였는데 정말 바쁜 내 심경을 대변해 주는 제목이라 직원들이 굳이 신청하지 않아도 몇 번 틀어주곤 했었다.



행복해하는 관객들을 볼 때, 그 순간의 행복감은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어서


이 일이 힘들어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행복해하는 관객들을 볼 때의 행복감이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일을 오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서 체력관리에 더 힘을 쏟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등산도 다니고, 많이 걷고, 또 실내 사이클도 시작했다. 더 오랫동안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운동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이전 04화 공연기획자의 하루 재구성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