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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공간, 변화하는 운명(水)

물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재물의 흐름이다.

by 운채



나의 인테리어 인생을 통틀어, 가장 고된 현장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것이다.



2024년 새해 시작과 함께 마주한 이 공사는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동시에,내가공간철학자로서오행의근본원리를깨닫게된인생의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현장에서 가장 예민하게 신경 쓰는 공정이 하나 있다. 바로 수도 설비다. 물이란,

단순한 기능을 넘어 삶의 흐름의 순환, 감정의 정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동양 오행에서 ‘수(水)’는 곧

재물이다. 현장에서는 배수와 급수라는 기능으로만 보지만, 공간디자이너의 눈에는 인연과 자금의 순환 속도로 보인다.

그런 탓일까. 그동안 수영장, 찜질방, 수족관 공사까지 물과 관련된 현장에선 늘 예상치 못한 문제들이 터졌다. 그 모든 물은 내게 복잡하고도 깊은 숙제였다.


물의 과잉이 빚어낸 시련

이번 현장은, 두 명의 동업자가 함께 운영하던 미용실을 한 분이 인수해 공간을 축소하는 리모델링 프로젝트였다. 이 상가는 아파트와 연결된 복합건물로, 물의 설비 구조가 무척복잡했다. 별도의 설비 담당자 없이, 방앗간을 운영하던 입주민 한 분이 단순 관리만 해오던 곳이었다. 전기도, 수도도, 아무도 제대로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직접 발로 뛰며 배관의 위치를 찾기 위해 건물 지하를 돌고 또 돌았다. 배관의 위치를 찾기위해 아파트 주차장 주변을 며칠 동안 헤매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현장을 이해해야 했다.


이 미용실의 원장님은 지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였는데, 그만큼 VIP 고객이 끊이지 않는 분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물 사용량이 일반 미용실의 두 배에 달했다. 문제는 ‘온수기 용량’에서 터졌다.

시공 당시 200L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했지만, 오후에 “샴푸대에서 따뜻한 물이 안 나와요.”

라는 전화가 왔다. 재물의 정체를 알리는 물의 전조였다. 급하게 대용량으로 온수기를 교체하고, 안정을 찾나 나 싶던 그날 밤, 물이 다시 한번 내게 시련을 안겼다.


원장님이 지인에게 맡긴 설치팀이 전기온수기 이음 부위를 잘못 감아 테프론이 풀려버렸고, 매장은 물바다가 되었다. 그날 밤, 자동문 앞까지 찬 물을 보며 말문이 막혔다. 세상에..... 물은 이토록 예측 불가능하고, 한번 넘치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기운이다.


인연으로 건너가는 다리

비록 우리 잘못은 아니었지만, 몇일 밤을 작업하며 초췌해진 원장님의 모습을 보며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우리는 서로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 미용실의 단골이 되었다. 집에서 거리가 꽤 되지만

지금도 머리는 그 원장님께만 맡긴다. 원장님은 나에게 파격적인 가격과 정성으로 보답해 주고,

나는 그분을 내 인생 후반기에 만난 최고의 인연이라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에게 헤어스타일은 외모의 절반 이상을 결정짓는다. 그 절반을 책임져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내 삶의 기운을 함께 다듬어주는 이가 있다는 뜻이다. 이 인연은 어쩌면 ‘악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분명히 또 하나의 ‘좋은 인연’으로 건너가는 다리였다.


물은 형태가 없지만, 모든 것을 담아낸다. 재물의 예측 불가능성, 인연의 변덕까지도 말이다. 나는 이 미용실 공사를 통해 물의 기운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물은 불안정하므로 공간 디자인에서는 불필요하게 투명한 유리 소재나 급격한 곡선을 남발해서는 안된다. 이는 재물을 예측 불가능하게 흘려보내는 디자인적인 실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흔들리는 물의 기운을 단단하게 잡아 줄 '무게중심'이다.

다음 장에서는 물의 변덕을 멈추고 공간에 안정감을 선사하는 '흙(土)'의 기운을 만날 것이다.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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