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외모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 생텍쥐페리
첫 요가 수업 이후로, 내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을 피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기억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사람을 만나기 싫어했던 한 조각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 나 역시 어릴 적부터 외모에 대한 칭찬과 험담을 많이 들으며 자라왔다. '여자는 자고로 예쁘고 착하고 똑똑해야 한다'라는 말이 내 인생의 신념이었다. 흔히들 지, 덕, 체라고 하는 그 세 꼭지점을 모두 충족하기 위해 난 늘 가꾸고 배우고 웃어야 했다.
그러다 한창 취업준비를 하던 시절, 난생 처음으로 볼에 트러블이 빼꼼 올라왔다. 지금은 나이가 나이인지 몸에 수분이 빠지면서 술 마신 다음날이나 유독 피곤한 날 심심찮게 등장하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내 인생 최초의 뾰루지라 매우 당황했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없어지겠지, 하고 그대로 놔뒀는데 웬걸, 들어갈 생각은 안하고 친구들을 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하나씩 크고 작은 트러블이 내 볼을 덮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트러블이라는게 나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나 하나 뿐이다.)
화장품도 바꿔보고, 잠이 부족했나 싶어 잠도 더 자보고, 식습관도 평소보다 더 규칙적으로 바꿔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내가 더이상 거울을 보기 싫어졌다는 것이다.
빨간 점박이가 생길 때마다, 또 커질 때마다 내 심장에도 뭔가 답답한 덩어리가 생기는 것처럼 숨이 꽉 막혔다. 거울을 통해 변한 내 피부를 바라보는 게 두려웠다. 내가 내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지자,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볼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생겼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피부가 왜 그렇게 됐어?'라는 말을 할 때마다 그 믿음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나를 바라보듯, 타인도 비웃음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까 두려운 마음에 점점 눈에 띄지 않는 검정색 옷으로 나를 가리고 다녔다. 학교에선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봐 뒷문으로만 몰래 다녔고, 그렇게 조용히 잊혀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나의 외모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 내 망가진 외모를 보면 떠나버릴까 무서웠다. 아무 의도 없는 시선도 내 마음에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혔다.
고작 피부 트러블 따위가 당시의 나를 그토록 괴롭혔던 이유는, 그 당시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외적인 조건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 피부, 몸매, 표정, 태도. 그 중 무엇 하나만 완벽함에서 벗어나도 나는 가치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내 자신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모든 고통은 '특정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그 착각의 기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내가 충분히 많은 것을 알지 못하면, 내가 모든 걸 완벽히 해내지 못하면, 내가 타인에게 다 맞춰주지 못하면...
그 당시 나는 '내가 외적인 아름다움을 잃으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착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처음 요가를 할 때 두려웠던 것 또한 외부의 시선이었다.
내가 완벽한 아사나를 만들지 못하는 것, 힘든 수련에도 예쁜 헤어스타일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가끔 레깅스가 말려내려가 깔끔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 그렇게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웠다.
요가 매트 밖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완벽하게 끝내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시작조차 안해버리는 것, 내 진짜 모습을 들키면 버림받을까봐 철저히 타인에게 나를 맞추는 것, 무지함을 인정하기 싫어 타인에게 나의 옳음을 강요하는 것, 그러다 먼저 이별을 고하고 사라져버리는 것.
아는 척, 착한 척, 그 모든 척들이 다 내 자신에게 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조건적인 사랑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은 끝나지 않는 감옥과도 같다. 모든 조건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러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건한 마음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 안에 숨어있는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 마치 우뚝 솟은 산이 계절이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지만,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의 가치 또한 변화할 수 있는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내적인 본질에 두어야 한다.
안에 숨어있는 본질은 당연히 바깥에서 관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본질을 바라보게 되면 더이상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지지 않는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나의 본질 또한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나를 판단하는 것 또한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보듯 그냥 넘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샘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알기에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 때부터 나만의 샘을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