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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령 Mar 24. 2024

1.1 잃어버린 나를 되찾다.

요가 매트 위에서 마주한 진짜 내 모습 - 과잉각성

“끝없는 고통의 악순환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면 당신은 깨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 에크하르트 톨레 '삶에서 다시 떠오르기' 中-




퇴근길 다짜고짜 회사 앞 공사중인 요가원에 회원권을 등록하러 갔다.


관심분야에는 '요가'와 '명상'에 동그라미를 쳤고, 수련을 등록한 이유에는 '스트레스 관리'라는 짧은 이유를 적어넣었다. 여섯 글자에는 훨씬 많은 스토리가 담겨있었지만, 내가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다 한들 남들은 모든 스토리를 똑같은 여섯 글자로 축약할 게 뻔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공사를 마친 요가원에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


온통 화려한 요가복과 요가매트를 가져온 다른 수련자와 사이에서, 나는 칙칙한 검정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쭈뼛쭈뼛 아무 자리나 (선생님이 잘 보이지만 선생님은 내가 잘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찾아 앉아서 어색하게 수업을 시작했다.


처음 앉은 공간, 처음 보는 사람, 처음 하는 움직임 속에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의외로 눈을 감고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바로 불안감이 엄습했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공격했다. '나 지금 잘하고 있나?' '누가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어떡하지?' '혹시 속으로 날 비웃고 있는거 아니야?' 정도가 정형화된 생각이었고, 그 생각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불안감이 되어 나를 잡아먹었다.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지금 당장 눈을 뜨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는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기분. 순간적으로 숨이 가빠오고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


나는 계속 눈을 떠 주위의 상황이 위험하지 않은지 확인하고 나서야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내 감각과 움직임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주변의 상황을 체크하려 하는 불안정한 모습이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진짜 '최세령'이었다.




(source: https://themindsjournal.com/quotes/hypervigilance-is-mental-health-quotes/#google_vignette)



내가 보인 모습은 과잉각성(Hypervigilance) 반응이었다.


교감신경계의 과한 각성으로 인해 외부 환경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증상을 말한다.


우리 몸의 자율신경계는 교감신경계와 부교감신경계로 나뉘어있는데, 부교감신경계는 신체의 이완을, 교감신경계는 신체의 긴장을 담당한다. 즉, 부교감신경계는 신변이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상태에서 활성화되고, 교감신경계는 신변에 위협이 있는 상황에 활성화된다.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지며 우리 신체는 생존모드에 돌입하게 된다.


과거 동굴에서 살았던 인류에게는 교감신경계의 활성화가 생존에 매우 중요했었다. 갑자기 짐승이 들이닥친다거나, 천둥번개가 친다거나, 다른 부족과의 전투가 있다거나 하는 생명에 직결된 물리적인 위협이 주변에 늘 도사리고 있었기에, 생명의 위협이 감지되면 모든 신경을 생존에 맞춰 빠르게 대응해야 했다.


과거와 다른 점이라면 과거는 단발적인 물리적 위협이지만, 현재의 스트레스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정서적인 위협이라는 점이다. 현대의 정서적 위협은 주로 이런 것들이 있다.

1. 장기간 지속되는 스트레스 상황에 처한다.

2. 안전을 위협 받는 환경에서 지낸다.

3. 타인이 다치거나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4. 연속적인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수차례 반복되면, 활성화되었던 교감신경계가 안정화되지 못하고 각성된 상태를 유지한다. 이를 과잉각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잉각성이 유도된 상황이 지속되면, 아래와 같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1. 나에게 위협적인 대상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2. 사소한 자극에도 쉽게 놀란다.

3. 혈압이 높고 심박수가 빠르다.

4. 특정 상황을 강박적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러한 증상이 지속되면, 불면증, 불안증 등 일상에 영향을 끼치는 더 큰 질병을 낳을 수도 있다.




나의 과잉각성 증상은 요가매트 위에서 뿐만아니라 일상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무엇을 하든 남들에게 어떻게 보여질지를 걱정하고, 인정받기 위해 내 자신을 몰아붙였다. 내 자신에게 잠시의 휴식도 허락한 적 없었고, 그런 만큼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쉽게 우울하고 분노했다.


매일 밤 계속되는 걱정에 잠들기 어려웠고, 작은 시계 초침 소리도 위협적으로 들렸다.


이런 내 모습이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원인을 안다는 것은 언젠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우선 요가매트 위에서의 행동을 고쳐보기로 했다.


남들과 내 모습을 비교하지 않게 늘 요가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남들이 보이지 않는 맨 앞 구석자리를 차지했다. 눈을 떠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에 새까만 옷을 입고 애쓰는 여자. 그게 어쩌면 그 당시 삶 속에서 내가 추구하던 나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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