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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세령 Apr 07. 2024

1-3. 어릴 적부터 적립해온 트라우마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남긴 혼란형 애착유형

요가 매트 위에서 내 회피적 성향을 발견한 나는 일상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나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나만의 패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트라우마 기억이 어떤 것인지 파헤치기 위해서 말이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호흡명상을 하면서 보이는 내 행동과 일상 생활에서의 습관을 연결시켜보기로 했다.


어느 날은 나의 자책하는 습관이 발견됐다. 명상을 하던 중 나도 모르게 움직이면 나를 움직이게 만든 불편감이나 상황을 탓하는게 아니라 내 의지를 탓했다. 관계 속에서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모두 나의 미숙함이나 꼼꼼하지 못함을 탓했다. 똑같은 상황에서 타인이 자책하지 않으면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나만 양보해야 하지?'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지?'라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눈깜짝할 새에 그 우울감은 내 이성을 집어삼켜버렸고, 감정적으로 변한 나는 상대방에게도 자책감을 강요했다. 내 감정을 상대방도 똑같이 느끼길 바라며,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깊은 관계도 칼같이 끊어버렸다.


또 어느 날은 관계를 끊어내는 방식이 관찰됐다. 명상 도중 불편한 부위가 관찰되었다. 한 번 참고, 두 번을 참았는데 도저히 세 번은 못 참겠어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내가 관계 속에서도 삼진아웃 제도를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쳤으면 하는 점을 세 번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고 느끼면 가차없이 관계를 단절했다. 그 사람의 사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세 번의 기회를 발로 걷어찬 너의 탓이야, 라고 혼자 위로하며 내 상실감을 달랬다. 잘한 선택이라고, 언젠간 결국 끊어질 관계였다고.


그렇게 내가 관계를 끊고 혼자 숨어버리던 발자취를 따라가자, 그 속에 숨은 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외로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끊어낸 이유는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의 사소한 행동은 여자아이들의 귓속말 몇번만 거치면 나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그들 사이에서 난 하루만에 천사가 되고, 또 하루만에 악마가 되었다. 그런 나에게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옆에 시한폭탄을 두는 것과 같았다.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내겐 불가능에 가까웠다.


친구와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곁에 남지 않는 외로움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버림받기 전에 먼저 끊어내는 것을 택했다.

내가 먼저 관계를 끊어내버리는 게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이었다.

내 자신을 더 숨기고, 입을 더 닫고, 조용히 눈에 띄지 않는 게 가장 쉽고 간편한 방법이었다.


가까운 관계가 될수록 내 진짜 속마음을 말하는게 점점 어려워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타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어졌다. 그렇게 나는 감정적으로 점점 무뎌지며 내게도 타인에게도 무감각한 회피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애착유형은 자신과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자신과 타인을 모두 긍정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게 우리가 그토록 되고 싶어하는 '안정형' 애착이다.

'집착형' 혹은 '불안형' 애착 유형은 자신을 부정하고 타인을 긍정하는 유형이다.

'회피/거부형'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회피형'은 자신은 긍정하나 타인을 부정하는 유형이며,

'회피/공포형' 혹은 '혼란형'은 자신도 타인도 모두 부정하는 유형이다.


자신에 대한 부정은 자책감, 불안감 등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부정은 분노와 거부감 등의 감정으로 나타난다. 두 가지가 공존할 때는 자신도 타인도 믿지 못하는 까닭에 우울감과 외로움, 무기력 등 혼란스러운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우울하게도 나는 매우 강한 '회피/공포형' 애착이었다. 나를 탓하고 타인을 탓하다 끝끝내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는 성인기가 되어서도 흉터를 남겼다.


하지만 모든 흉터의 근원은 결국 외로움이었다.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 버림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 모든 마음들이 결국은 외로움에서 출발한 거였다.


그러나 이미 난 너무 많은 관계를 끊어내버린 상황이었고, 다시 끊어낸 관계를 잘해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바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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