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 검은 봉지는 뭐야?

by 김혜정

(대문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List.naver?blogId=jinaneyo)



11월 22일. 수요일. 네 번째 상담.



"65 이상이 나오면 좀 더 신중히 봐야 하거든요? 근데 모든 항목이 지표 65 이하로 나와서 뭐 별다른 거는 없네요. 보통 수준이에요. 특별히 설명드릴 만큼 중요한 지표는 없어요. 그래도 그중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온 거를 말씀드리자면, '자의식, 지배욕' 이 두 가지가 높게 나왔네요."


지난번 했던 MMPI-2 검사 결과를 상담사는 이렇게 간단하게 짚고 넘어갔다. 567개나 되는 문항 - 초간단한 OX 유형이라 스피드 퀴즈처럼 가볍게 풀긴 했지만 - 에 답한 결과가 이다지도 심플하다니. 그래도 자의식과 지배욕이 높은 편으로 나왔다는 건 그래 알고 있어. 내가 그렇다는 거. 나를 객관화해 주는 이 두 가지 항목은 중요한 지표니까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분석해 보고 싶군. 근데 다른 검사들에 대한 결과는 얘기 안 해 주나?


"그런데 선생님은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아~ 힘든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힘들어도 티 안 내고 극복하려고 하는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맞아요. 선생님은 남들에게 잘하려고 애쓰시잖아요. 그 애쓰시는 모습 안에서 저는 '슬픔'이 느껴져요. 혹시 떠오르는 슬픈 기억이 있으신가요?"



어린 6살의 나, 나에게 다가가 말 걸기

슬픔이라고? 갑자기? 슬픔? 음.. 인사이드아웃의 슬픔이가 떠오르네. 최근엔 슬픈 기억이 별로 없는데...

아! 미간을 찡그리자 한 장의 사진이 필름처럼 뇌 본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6살 때쯤이라고 알고 있는 사진 속 나의 모습이었다.

사진이 생각나요. 저는 6살 정도구요. 기둥에 기대고 서서 울고 있는 장면이에요. 거긴 결혼식장이었는데 저는 혼자 울고 있었죠. 우리 어렸을 적 사진이 몇 권의 앨범에 가득가득 꽂혀 있거든요. 그 앨범을 심심할 때 혼자 넘겨보곤 했는데 그렇게 혼자 서서 울고 있는 모습이 가슴 어디께에 걸려 있는지 '슬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니까 생각이 나네요. 언젠가 엄마한테 물어봤었죠. 난 그때 왜 울고 있었냐구요. 엄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뭐가 맘에 안 드니까 떼 부리다가 운 거지 뭐~~ 하셨어요. 엄마도 정확한 이유를 기억하진 못했고 저두 그랬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지금 프게 느껴지네요.


"그럼,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어 볼까요? 이제 눈을 지그시 감고 한번 그 사진 속 아이를 떠올려 보세요."


상담사는 내면의 슬픈 아이와 내가 만나는 장면을 연출했다. 아, 이게 내면의 아이와 화해하게끔 하는 기법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오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하기 싫었다. 저 하기 싫은데요? 하고 용감하게 반항해 볼까? 에잇, 이미 눈을 감았네.


"그 아이가 선생님 같으세요?"

(상담사가 틈을 안 주고 질문을 퍼붓는다.)


아니요, 그냥 어떤 아이 같아요. 저 같지는 않아요. 저는 그 아이에게 다가가는 어른이구요.


"그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뭐, 그냥 아무 말도 하고 싶진 않은데요. 그냥 손만 잡아주고 싶어요. (작고 연약한 손이다.)


"아이 손을 잡아주니까 아이는 어떻게 하나요?"


눈물을 멈추고 저를 쳐다보네요. 저는 무릎을 접고 앉아서 아이보다 눈높이가 낮아져 있고, 아이는 저를 내려다보고 있어요.


"그 아이에게 뭐라고 말해 주고 싶으세요?"


왜 울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요.


"왜 울고 있다고 하나요?"


자기도 모른대요. 엄마가 그냥 절루 가 있으라고 했대요. 사람들도 많고 인사해야 되는 사람도 많고 정신없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대요.


"아~ 엄마가 저쪽으로 가있으라고 해서 아이가 슬펐군요. 아이는 그때 엄마가 어떻게 해 주길 원했을까요?"


그냥 엄마가 손잡아 주고 옆에 있게 해 주길 원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자기를 보호해 주길 원했겠죠.


"아~ 아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엄마가 자기를 보호해 주고 바라봐 주기를 원했던 거네요. 이제 그 아이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으신가요?"


엄마한테 데려다주고 싶어요.


"그럼 그 아이를 엄마한테 데려다주세요. 그 아이 마음은 어떤 것 같아 보이나요?"


이제 안심이 돼 보여요. 편안해 보여요.



나 스스로도 마음을 치유할 수 있구나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눈꺼풀이 들썩들썩했다. 행여나 눈이 떠질까 봐 속눈썹에 힘을 주면서, 난 그 여섯 살 난 어린아이와 진심으로 만나려고 노력했다. 그 작은 손가락의 손끝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못생긴) 그 아이와 눈을 마주쳤을 때, 여섯 살 아이의 흐리멍텅한 눈빛은 마흔일곱 살을 먹고도 여전히 갈팡질팡하는 어른의 눈빛과 어쩌면 똑 닮아 보였다.


상담사는 물었다. 눈을 감고 이렇게 내면의 아이를 만나보니 어땠냐고. 나는 처음 해 보는 거라서 어색했고, 처음엔 그 아이와 내가 동일시되지 않았지만, 상담사님이 내가 되고 내가 어린아이가 되어 대답을 했을 때부터는 희한하게도 약간은 그 아이와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상담사는, 내가 처음에 그 아이에게 낯선 감정을 느끼고 나와 동일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아이의 모습이 못나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못나 보이는 모습이라서 무의식적으로 멀리 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래, 그 해석이 맞았다.


상담사는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다.

"사실, 스스로도 얼마든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거예요. 과거에 못났던 자기 모습이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들에 대해서 오늘 했던 방법으로 해 볼 수도 있고 글로 써서 해볼 수도 있구요."


오~ 그렇겠네요. 혼자 생각하는 방식으로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글로 쓰는 건 해볼 만하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상담사 선생님이 이끌어 주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만 같지는 못할 것 같아요. 아, 근데요~ 저요. 눈을 떴을 때는 또 다른 사진이 하나 떠올랐어요. 그 사진은요. 초딩 1학년 때 우리 앞집에 살던 제 친구 향선이랑 찍은 건데요. 우리집 옥상에서 약간 높은 곳에 둘이 올라가서 앉았고 향선이랑 저랑 빠글빠글 머리를 해가지구 두 팔은 군인처럼 다리 위에 곧게 뻗어 올려놓고서, 둘이 같이 하하하 하고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는 사진이거든요. 얼굴이 빵빵해가지고 터질 것 같고 앞 대문니는 두 개나 빠져서 휑하니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그런 모습이에요. 그게 갑자기 생각났어요. 신기하게두요.


"선생님~, 선생님은 처음엔 슬픈 장면으로 시작해서 그렇게 행복한 얼굴이 떠오르는 걸로 끝을 내셨네요. 선생님은 생각지도 못하셨던 일인데 말이죠. 내면의 아이를 대한다는 게 지금은 어떤 것 같으세요?"


그러게요. 내면의 아이가 편안해지니까 저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동일시하지 않았던 아이지만 결국 그 아이를 내 모습으로 인정하게 된 것 같고, 혹시라도 다른 못난 모습이나 수용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떠오르면 그걸 마주할 수 있는 용기도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소중한 경험이네요. 처음엔 싫었는데 말이죠. 하하하. 통쾌한 내 웃음소리에 상담사님도 덩달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엄마, 이 검은 봉지는 뭐야?

그리고 이런 얘기를 해 주었다. 내가 슬픈 기억으로 엄마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따로 떨어져 있던 장면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에 엄마의 빈자리를 느꼈던 경험 때문일 거라고 말이다. 맞다. 상담사의 말이. 나는 보호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처한 환경 가운데서 엄마의 단단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땐 생각이 안 나서 상담사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내 유년 시절의 엄마는 자신의 자리를 종종 비워 두곤 했다.


엄마는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우리 할아버지의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고 또 나갔었다. 나는 어떤 때는 할아버지와 함께, 어떤 때는 이모와 함께 엄마를 찾아다녔다. 마당이 있는 처음 보는 어떤 집 안쪽 어느 귀퉁이에서 엄마는 꽁꽁 숨어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다. 귀머거리 벙어리였던 할아버지가 웅웅 거리면서 내가 잘못했으니 얼른 집에 가자고, 이 어린 딸이 엄마 보고 싶다고 맨날 운다고 손짓으로 말하면, 엄마는 싫다고 그 집구석에는 절대 안 간다고 하면서도 결국엔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서곤 했다. 어린 나는 불안했고 초조했다. 엄마가 또 언제 없어질지 몰라 두려웠다.


그러다 장롱에 숨겨놓았던 검은 봉지에서 이상한 약들을 발견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커덕 내려앉았다. 엄마, 이거 뭐야? 하고 검은 봉지를 들이밀었을 때,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그건 그 안에 도로 넣어 두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왜 그걸 꺼내서 야단이냐고 말이다. 그건 엄마가 먹고 죽으려고 사놓은 거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난 향선이네 아줌마를 부르러 달려갔다. 나에겐 그 시절 향선이네 집이 제2의 고향이었고 향선이 엄마가 제2의 엄마였다. 아줌마!! (엉엉ㅠㅠ) 엄마가 죽으려고 약 사다가 장롱에 넣어놨어요!! (엉엉ㅠㅠ) 아, 눈물이 난다.ㅠㅠ. (향선이 아줌마 잘 계시나요.ㅠㅠ.) 향선이 아줌마는 욕을 욕을 씨부리면서 나보다 더 빨리 우리집으로 쳐들어갔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애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엄마를 나무랐다. 엄마는 왜 내가 그런 얘기도 못하냐고, 몇 살 더 많은 향선이 아줌마에게 대고 울부짖었다. 엄마도 울고 향선이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렇게 여자 셋은 목놓아 대성통곡을 했었다. 그 장면이 생각난 적은 많았는데 이렇게 눈물 콧물이 쏟아지기는 처음이다. ㅠㅠ.



유년 시절의 나에게

이 뒤에 이어졌던 상담 내용이 사실은 핵심이었는데 오늘은 쓰지를 못하겠다. 마음을 추슬러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쓰면서 다시 내면 아이와 만나게 되는구나. 그래, 초1이었는지 2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혜정아, 빵빵한 얼굴로 호탕하게 웃던 너에게도 참 어두운 기억들이 많아. 그렇게 어둠 속에서도 불안 속에서도 씩씩하게 웃으면서 살려고 애쓰느라 얼마나 힘들었니. 그래, 고생 많았다. 혜정아. 엄마한테 보호받고 싶었지만, 엄마를 보호해 주고 엄마를 살려야 했던 넌 얼마나 힘들었니. 마흔일곱의 네가 어린 너를 이제야 토닥여주게 됐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그동안 너무 외면해서. 이젠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게. 이제 너를 더 많이 안아 줄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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