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와 지지난 주에는 상담이 없었다. 한 번은 내 사정으로, 한 번은 상담 선생님의 사정으로. 이렇게 두 번이나 상담 시간이 결빙되었지만 연재의 끝을 향해 가는 시점에서 두 손 놓고 있기는 싫어서 오늘 도서관에 왔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어제 브런치의 일요일 연재글을 여러 편 읽었다. 그중 나의 정신을 압도한 글이 있었으니, 바로 '호앙'을 필명으로 하시는 작가님의 글이었다. 최근 읽었던 쇼펜하우어의 글을 간접적으로 다시 만나는 기분도 들었고 또 내가 최근 생각하는 것들의 총합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어떤 철학자인지 아직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분은 오래전부터 힘들 때마다 쇼펜하우어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연재글의 제목으로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라고 이름 붙였다. 개인 상담을 통해 내가 어떤 자아를 갖고 있는지, 나는 진실로 무엇을 소망하며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길지 않은, 나의 지나간 47년의 인생이 욕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면 그 욕망은 합당한 것이었는지, 비로소 나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욕망으로 거듭나야 하는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차피 욕망 떵어리인 것인지에 관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무한한 욕망 때문인 것이라고. 그런데 호앙 작가님도 그렇게 말했다. 인간이 괴롭다면 그것은 생명 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욕망 때문이라고. 그래, 어쩌면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하며 극대화된 공감을 브런치 글을 매개로 느낀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율했다. 쇼펜하우어의 책보다도 호앙 작가님의 단 한 편의 글을 통해서, 이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만난 실존적 인간(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공감했다는 것에. 이것이 나를 전율케 했다.
이런 전율의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각을 일깨운다. 내가 흘려보낸 사소한 상념 따위가 어느 구석진 자리에서 언어의 실체로 다시 얽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가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던 말들이 아주 정갈하고 굵직한 문장들로 다시 태어나 있을 때,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지만 정확히는 몰라서 헤매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아! 그래 바로 이 말이야! 하고 통쾌하게 무릎을 치게 될 때, 나는 감동으로 소스라친다. 그랬다. 그 한 편의 글을 읽으면서 다음에 쓸 글에 대한 영감을 얻은 감동은 나에게 기쁨으로 돌아왔다.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쇼펜하우어가 주었을지라도 난 정녕 어제 처음 브런치에서 만난 작가에게 얻은 것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단지 '인정'이 아니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한 인정, 나의 시선을 통한 인정? 둘 다 땡이다. 정답은 '자유'였다. '자유의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자유'. 그러니까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유다. 물론 그런 자유를 얻기 위해 나는 계속 인정을 추구할 것이다. 타인에게 얻는 인정도, 나 자신을 충족하는 인정도.
그러나 거기에 얽매이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남이 차려주는 밥도 먹고 내가 스스로 차린 밥도 먹듯이, 남이 주는 인정도 먹고 내가 스스로에게 먹이는 인정도 받아먹을 것이다. 주체적인 삶을 위해 물론 내가 스스로 차려먹는 인정이 더 우선이지만 남이 떠먹여 주는 인정도 얼마나 고마운가.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 나는 그렇게 인정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욕구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함이 아닐는지. 아직 나는 물질로부터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지만 느낌이 온다. 나에겐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갈 자유의지가 있다는 느낌. 그 자유의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조금씩 자유를 활용하고 그것을 느껴본다. 아마 내가 더 큰 그릇이 되면 내 그릇 안에는 인정욕구보다 자유의지가 훨씬 더 가득차 있을 거라는 걸 그리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연재의 마지막 글에 실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일주일이 앞당겨졌다. 인생은 이렇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나는 인생을 사랑한다. 인간의 인생이란 이렇게 달고 오묘한 것이니까!